진주류씨의 득관조는 대승공 류차달의 10世이신 진산군 류인비이시며, 진주류씨의 번성은 장손 호양공 류혜방과 차손 안간공 류혜손이 고려조에서 등용되면서 크게 떨쳤다. 진주류씨는 시대적 변천에 따라 종래에는 오문(吾門)의 후예들이 각자 선대를 찾아 위선과 동족간의 친목을 도모하는 것으로 전승하여 왔으 나 대승공 15세(十五世)인 이판공파 류이(吏判公派 柳怡). 북부령공파 류열(北部令公派 柳悅), 시윤공파 류척(寺尹公派 柳惕)가 진주류씨종회를 결성하고 안간공파(安簡公派)를 본회에 합류시켜 진주류씨대종회로 재정비, 명실 공히 4대 종파(四大 宗派)가 이끌고 있으며 그 하부에 44개의 지파가 운영되고 있어 충효전가, 청백유업의 정신을 이어받아 명문가로서 자손만대에 기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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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이柳怡 약사]

[류열柳悅 약사]

[류척柳惕 약사]

[류혜손柳惠孫 약사]

 

 

1. 이판공파조 류이 약사(吏判公派祖 柳怡 略史)

 

    이판공 휘 이 지묘

公은 청백리공 류겸(淸白吏公 柳謙)과 참찬 양정공 최렴(參贊 良靖公 崔濂)의 따님인 충주최씨의 4남3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생존연대와 자(字), 호(號) 등의 자세한 행적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만, 족보상에 사수시 녹사(司水寺 錄事)를 지낸 것으로 되어 있고 사후에 자손이 크게 영달하여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사수시란 고려 후기에 여진과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중요한 만(灣)과 포구(浦口)를 관장했던 관서로서 조선조 주요 관직표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그리고 녹사란 고려시대 관직표를 보면 9품(九品)에 해당된다.

 

조부가 정평공 구(靖平公 玽), 증조가 호양(익양)공 혜방(胡襄/翊襄公 惠芳), 고조가 진주백 유(晉州伯 洧)이다. 5대조(五代祖)가 바로 진주류씨의 중시조인 판시사공 진산군 인비(判寺事公 晉山君 仁庇)이며 公이 바로 5대 종순(五代 宗孫)이다. 장인은 고려조에 판도판서(版圖判書: 조선조 호조판서에 해당)를 역임한 윤승례(尹承禮)이다. 윤승례의 손녀가 세조비(世祖妃)인 정희왕후(貞熹王后)로 公은 세조(世祖)의 처고모부(妻姑母夫)가 된다. 사돈은 세종의 국구(國舅: 장인)인 청천부원군 심온(靑川府院君 深穩)이다. 심온은 영의정까지 올랐으며 조선조 개국공신으로 역시 영의정을 지낸 청송백 심덕부(靑松伯 沈德符)의 아들이다. 公의 代에 와서 公을 포함한 열(悅), 척(惕), 전(恮) 등 4형제를 두었으며 이중 公과 悅, 惕 등 3형제의 후손들이 크게 영달함에 따라 각각 이판공파(吏判公派), 북부령공파(北部令公派), 시윤공파(寺尹公派)로 나뉘어졌으나 막내인 恮의 후손은 曾孫 代에서 代가 끊겼다.

 

배위(配位)인 파평윤씨(坡平尹氏) 사이에서 출생한 외아들 자해(子偕)는 영의정 심온(領議政 沈溫)의 사위가 되어 세종대왕의 손아래 동서가 되었으며 동부지돈영부사(同副知敦寧府事)를 지냈다. 손자인 균(均)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양(壤)은 상의원정(尙衣院正)을, 숙(塾)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오(塢)는 선공감정(繕工監正)을 각각 지냈다. 증손인 첨정(添丁)은 남원부사(南原府使)에 올랐고 순정(順汀)은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고손인 빈(濱)은 이조판서(吏曹判書), 부(溥)는 좌의정(左議政), 영(濚)은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지냈다. 6대손(六代孫) 용근(庸謹)은 우승지(右承旨)와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에 올랐고 문통집(文通集)을 남긴 大學者 서파 희(西陂 僖) 등 영달한 후손이 대(代)를 이어 배출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교하동(향교동) 진좌에 쌍분으로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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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열柳悅 약사]

[류척柳惕 약사]

[류혜손柳惠孫 약사]

 

 

2. 북부령공파조 류열 약사(北部令公派祖 柳悅 略史)

 

    북부령공 휘 열 지단

公은 청백리공 류겸(淸白吏公 柳謙)과 참찬 양정공 최렴(參贊 良靖公 崔濂)의 따님인 충주최씨 사이에서 4남3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조부가 정평공 구(靖平公 玽), 증조부가 호양(익양)공 혜방(胡襄/翊襄公 惠芳), 고조가 진주백 유(晉州伯 洧)이다. 진주류씨의 중시조(中始祖)인 인비(仁庇)가 5대조(五代祖)이다. 公의 손아래 동서는 황희 정승의 아들인 황치신(黃致身)이다. 公의 생존연대와 자(字), 호(號)를 비롯하여 자세한 행적은 전해오지 않고 있다. 다만, 음사(蔭仕)로 출사(出仕), 북부령(北部令)을 지냈고 그 후 자손이 현달하여 승정원 좌승지(承政院 左承旨)로 증직되었다.

조선조 세종실록 14년(1432) 4월 23일 기록에 세종이 경연(經筵)에 나아가 소격전(昭格殿)의 눈먼 노비 복덕(奴婢 福德)이 식량이 끊어져 어린아이를 안은 채 거의 죽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놀라 소격전의 전직 선숭렬(殿直 宣崇烈)과 公을 형조에 내려 보내 추국(推鞫: 의금부에서 죄상을 다스림)하라 하고 복덕에게 쌀과 콩을 각각 한섬(一石)을 주게 하라고 분부하였다는 짤막한 대목이 실려 있다. 북부령(北部令)이라는 관직은 태조 3년(1394)에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여 서울을 동ㆍ서ㆍ남ㆍ북과 중부 등 5개부로 나누어 소송, 도로, 방화, 택지 등과 관련된 일을 관장하도록 하였는데 오늘날 구청과 비슷하다. 각 부에는 그 수장인 령(令: 종5품) 밑에 도사(都事) 참봉(參奉: 종9품) 2명이 있었다. 배위는 판사 김기(判事 金淇)의 따님인 상주김씨(尙州金氏)이다. 아들인 시예공 자문(司藝公 子文)을 비롯하여 후대에 공조판서를 지낸 정민공 진동(貞敏公 辰仝), 승지를 지낸 도(濤), 경원부사를 지낸 용(溶),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를 지낸 충경공 형(忠景公 珩), 총융사(摠戎使)를 지낸 충장공 림(忠壯公 琳), 황해병사를 지낸 진양군 효걸(晉陽君 孝傑) 등 기라성 같은 문무반(文武班)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북부령파는 특히 조선 후기에 들어서 많은 무반(武班)이 배출되었는데 야당공 혁연, 무숙공 효원, 총융사공 상량 등이 대표적 인물로서 무반벌열(武班閥閱)의 진주류씨 이름을 빛냈다.

 

묘소는 일찍이 실전되어 선영인 경기도 고양시 행신동(번덕동) 세장지에 설단으로 모셔져 있다.

참고문헌 :「세종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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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시윤공파조 류척 약사(寺尹公派祖 柳惕 略史)

 

    시윤공 휘 척 지묘

公은 청백리공 류겸(淸白吏公 柳謙)과 참찬 양정공 최렴(參贊 良靖公 崔濂)의 따님인 충주최씨 사이에서 4남3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생졸연대와 자(字), 호(號) 등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조부가 정평공 구(靖平公 玽), 증조가 호양(익양)공 혜방(胡襄/翊襄公 惠芳), 고조가 진주백 유(晉州伯 洧)이다. 진주류씨 중시조(中始祖)인 판시사공 인비(判寺事公 仁庇)가 5대조(五代祖)이다.

 

公은 조선조 제4대 세종조부터 제7대 세조조까지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형조정랑(刑曹正郞) 등을 거쳐 국가의 제사 및 시호를 관장하는 봉상시(奉常寺)의 최고 실무책임자인 봉상시정(奉常寺正)을 역임하였다. 세종조 의금부도사 시에는 함경도 경원지방에서 성을 쌓는데 한때 뜬 말에 현혹되어 군졸들이 도망가고 흩어지는 불상사가 발생되자 公은 임금의 칙령을 수행하여 수습했다고 실록은 전하고 있다.

 

봉상시는 고려 목종 때 설치한 태상(太常)이 기원으로 조선조 태종 9년(1409)에는 전사시(典祀寺)로 개칭되었다가 세종 3년(1421) 다시 봉상시로 환원되었다. 公이 봉상시정(이를 봉상윤(奉常尹)으로도 부르며 시윤공이라는 호칭도 여기서 유래했다)에 임명된 것은 세조 즉위 이전(以前)이다. 公이 세조 즉위년(1455) 12월 27일 좌익원종 3등 공신(左翼原從 3等 功臣)에 녹훈될 때의 직책이 봉상윤(奉常尹)이었던 사실에서 이를 추정할 수 있다. 배위는 충주최씨로 아들 자행(子行)은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를 지냈다. 딸은 김선(金鐥)에게 출가했다. 아들 지행(子行)의 배위(配位)로 公에게는 며느리가 되는 진천송씨는 여원군 민무휼(驪原君 閔撫恤)의 외손녀이다. 민무휼은 태종비 원경왕후(元敬王后)의 친정 동생이다. 이후 公의 현달한 후손으로는 송화현감 여(松禾縣監 璵), 제용감정 광훈(濟用監正 光勳), 평택현감 광후(平澤縣監 光厚), 정민공 간(貞愍公 澗), 응교 여항(應敎 汝恒), 봉래부사 여각(汝恪), 진평군 기(晉平君 淇), 우승지를 지낸 공진(拱辰), 형조참의 사흠(思欽), 문장명세(文章鳴世)를 떨친 호은공 동량(壺隱公 棟梁)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정민공 간과 여항, 여각 형제 등 3부자가 모두 대과에 급제하여 청요직을 지냈다.

 

묘소는 경기 고양 화전원(高陽 花田原)에 모셨다가 일제 때인 1934년 서울 방배동 후록(後麓) 유좌(酉坐)에 천묘하였으나 1968년 도시개발로 다시 충남 천안시 목천읍 삼성리 건자원으로 옮겨졌으며 아들 子行, 孫子 장손(長孫)의 묘도 함께 이폄(移窆)했고 청화사(淸華祠)에 배향됐다.

참고문헌 :「세종실록」,「세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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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안간공파조 류혜손 약사(安簡公派祖 柳惠孫 略史)

 

    안간공 휘 혜손 배향(충정사)

公의 호(號)는 파은(坡隱)이며 시호(諡號)는 안간(安簡)이다. 생졸연대는 전해지지 않고 있는데 고려사를 비롯한 각종 문헌에 의하면 고려 충숙왕 초에 태어나 조선조 개국 초기까지 생존했던 것으로 입증된다. 公은 진주류씨 중시조 판시사공 인비(判寺事公 仁庇)의 손자이며 진주백 유(晉州伯 洧)의 2남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호양(익양)공 혜방(胡襄〈翊襄〉公 惠芳)과는 형제간이다. 公은 출사(出仕) 후 대소요직을 거쳐 재신급(宰臣級)인 밀직(密直), 첨의부 평리(僉議府 評理), 판후덕 부사(判厚德 府事)를 지냈다. 밀직은 왕명의 출납, 궁중의 숙위(宿衛), 군기(軍機) 등을 담당하는 직책이고 첨의부는 중앙행정의 최고기관으로서  고려 초기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으로 불린 곳이며 평리는 종2품 직책이다. 노년에 이르러 관직에서 물러난 공은 망국으로 기울어져 가는 고려 왕조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노심초사했으며 목은, 포은 등과 뜻을 같이 하였다.

 

우왕 14년(1388) 위화도 회군 이후 실권을 장악한 정도전, 조준 등 이성계 세력은 조선조 개국을 서두르고 있던 중 1389년 11월 김저사건이 일어났다. 김저는 이성계 세력에 의해 제일 먼저 죽임을 당한 최영의 생질로서 불교 최대행사인 팔관회에서 이성계 암살을 모의하였으나 밀고로 이성계가 나오지 않자 이성계의 집으로 잠입하여 살해하려다 실패한 사건으로서 이성계는 1392년 7월 수창궁에서 즉위하고 새 왕조 개국을 선포하면서 개국교서를 발표하였는데 公은 아들 향(珦)과 함께 이 사건에 연루되어 배소(配所)에서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으며 珦은 장형(杖刑)과 유배를 당하였다. 배위는 찬성사 현복군 권렴의 따님인 안동권씨이며, 둘째배위는 개성왕씨로 순인대군 상(順仁大君 瑺)의 따님으로 왕족이다. 셋째배위는 판밀직사 화평군 김광철의 따님인 광산김씨이다.

 

공은 4남3녀를 두었는데 琰은 문하시중 철성부원군 이림(李琳)의 사위이며 보문각대제학과 이조판서를 지냈고 찬(瓚)은 군자소감을 지낸 후 명나라에 귀화했다. 향(珦)은 개성소윤(開城少尹)을, 진(瑱)은 신령현감(新寧縣監)을 지냈다. 첫째 사위 낙안인 김구련은 전서(典書)를, 둘째 사위 한산인 이종덕은 밀직(密直)을, 셋째 사위 남양인 홍기는 전(典書)를 지냈는데 공은 둘째 딸을 목은 이색(牧隱 李穡)의 아들인 이종덕에게 출가시킴으로써 사돈지간이 되었다.

 

公의 후손들이 현달하여 대사헌공 세침, 소재공 순선, 겸재공 종선, 상유공 사규, 대사헌공 경종, 충정공 순익 등의 역사적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다.

 

公의 묘소는 경기 양주 미금면에 모셔져 묘지 앞을 광명대라 불려 졌다 하나 실전되어 1967년 경기 고양시 행신동 선영 세장지에 설단 하였으며 고려대전에 배향인물로 선정되어 배향되게 되었다.

참고문헌 :「고려사」,「태조실록」,「고려의 풍속」,「목은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