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진주류씨(晉州柳氏) 가문(家門)은 동국(東國)의 명문거족(名門巨族)으로 어느 가문(家門)에서도 뒤지지 않는 명가(名家)임을 자부(自負)하면서, 선조(先祖)들께서 문ㆍ무 양과(文ㆍ武 兩科)에 등제(登第)하시어 가문을 빛내신 관직(官職)을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국조방목(國朝榜目),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등에 수록(收錄)되어 있는 역사적 사실(史實)을 근거로 기록하였다. 병인보(丙寅譜 1987) 연방록(蓮榜錄)에 이어 임진보(壬辰譜 2012)에서는 연방록의 미흡(未洽)한 내용을 보강(補强)하여 사환록(仕宦錄)을 수록하였다. 태종 13년 고려시대 호적과 동방(同榜)의 문헌(文獻)등이 왕명으로 모두 불태워진 역사적 사실을 뒤로하고 토진주류씨(土晉州柳氏) 최초 족보인 갑진보(甲辰譜 경종 4년, 1724) 서문에서 정평공(柳구)이 공민왕 9년(1360)에 등과(登科)한 방목(榜目)의 아래가 멸실되어 4조(四祖)가 빠져 없으니 고증할 수가 없다 하였다. 사료(史料)의 보전(保全)이 불분명하고 불확실한 가운데 후대에 만들어진 신라ㆍ여조(新羅ㆍ麗朝)의 방목인 해동용방(海東龍榜, 국외유출자료 영인본 602-15)과 씨족원류(氏族源流) 기록이 토진주류씨 족보의 상계(上系)가 오류(誤謬)된 것인지를 모르고 그대로 인용 답습되어오고 있음은 그야말로 송구스럽고 개탄스러운 일임을 금할 수 없어 이에 잘못 기록된 정평공 류구(柳구), 문간공 류염(柳琰)의 조부와 증조부를, 그리고 청백리공 류겸(柳謙)의 증조부의 기록을 이봉진주류씨(移封晉州柳氏) 상계 계보(上系系譜)로 바로 잡았음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사료(史料)를 바탕으로 한 선조의 역사적 기록을 찾기란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일이지만 추원보본(追遠報本)의 정신으로 우리 후손(後孫)들은 꾸준히 노력하고 더욱 정진(精進)하여 아직 밝혀내지 못한 조상(祖上)의 발자취를 계속 발굴, 보완하여 그 덕목(德目)을 이어 나아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