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진주류문(晉州柳門)은 그동안 류(柳)ㆍ차(車) 문제(問題)에서 거의 독보적(獨步的)으로 중요(重要)한 역할(役割)을 한 류씨(柳氏)와 차씨(車氏)가 같은 조상(祖上)을 갖고 있다는 동조이성설(同祖異姓說)로 지금까지 300여년(餘年) 동안 류씨문중(柳氏門中)을 혼돈(混沌)에 빠지게 하였던 원파록(源派錄)이 날조(捏造)된 위서(僞書)임이 밝혀져 이제는 세보사(世譜史)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차씨(車氏)와 류씨(柳氏)가 동조이성(同祖異姓)이라는 이유(理由)로 공동대종회(共同大宗會) 성격(性格)의 단체(團體)였던 차류종친회(車柳宗親會)를 2007年 파기(破棄)하였음은 다행(多幸)한 일이다. 아무리 시조(始祖)와 가문(家門)의 역사(歷史)를 찬란(燦爛)하게 만들어 준다 해도 그것이 거짓이라면 이를 깨닫는 순간(瞬間) 고치는 것을 미루거나 꺼리지 말고 실천(實踐)함이 당연(當然)하므로 진주류씨세보(晉州柳氏世譜) 병인보(丙寅譜) 1986. p.60~p.77에 실려 있는 원파록(源派錄)을 삭제(削除)함과 아울러 그 실체(實體)를 요약(要約) 설명(說明)하여 우리 진주류문(晉州柳門)의 원류(源流)를 확실(確實)히 함이 마땅한 처사(處事)라 아니할 수 없다. 따라서 문화류씨세보(文化柳氏世譜) 무자보(戊子譜:2008)의 원파록(源派錄) 삭제(削除)의 변(辯)을 진주류씨세보(晉州柳氏世譜) 임진보(壬辰譜:2012)에 실어 진주류문(晉州柳門)은 문화류문(文化柳門)의 입장(立場)과 그 뜻을 함께 하고자 함을 천명(闡明)하는 바이다.

 

1. 위서(僞書) 원파록(源派錄)의 실체(實體)

차원부(車原)가 작성(作成)한 차문(車門)과 류문(柳門)의 세계(世系)가 같은 근원(根源)이라는 책(冊)을 모두 해주(海州)의 신광사(神光寺)에서 불태운 뒤 일시(一時)의 권신(權臣) 귀신(貴臣)들과 손을 잡고 화근(禍根)을 만들어 그 적씨(嫡氏)들을 모두 죽인 것이기 때문에 선계(先系)의 기록(記錄)이 없어졌다 하여 원파록(源派錄)이 소실(燒失)된 이유(理由)와 차원부설원기(車原雪寃記)를 만들어야 할 당위성(當爲性)으로 1580年 차원부설원기(車原雪寃記)를 위작(僞作)하였다. [강자조정함하구이차문근얼류차이성동원지야계전수분탕우해주신광사권결일시지귀인작차화지본근진감기적씨야성삼문봉교주(綱者趙鄭咸河俱以車門近孼柳車二姓同原之也系專數焚湯于海州神光寺權結一時之貴人作此禍之本根珍減基嫡氏也成三問奉敎主)]

 

차원부(車原)는 우왕(禑王) 12年(1386)에 가문(家門)의 역사(歷史)를 정리(整理)하는 것을 자신(自身)에게 주어진 사명(使命)으로 여기고 왕(王)ㆍ차(車)ㆍ류(柳) 삼성(三姓)의 역사(歷史)를 정리(整理)하여 왕차류보판(王車柳譜版)을 판각간행(板刻刊行)하여 해주(海州) 신광사(神光寺)에 소장(所藏)하였는데 1398年 태조(太祖) 7年 무인(戊寅) 음(陰) 9月 15日에 막료(幕僚) 이숙번(李叔蕃)과 사병(私兵)을 시켜 공(公)께서 한양(漢陽)에서 귀향(歸鄕)한다는 소식(消息)을 듣고 내외친족(內外親族)들이 마중을 나왔는데 송원(松原)과 마원(麻原)에서 70여인(餘人)을 일시(一時)에 추살(椎殺)하고 공(公)도 참화(慘禍)를 당했고 해주(海州) 신광사(神光寺)에 소장(所藏)되어 있는 판각보판(板刻譜版)과 문헌(文獻)들이 분탕(焚蕩) 소실(燒失)되었다고 하였다. 이는 원파록(源派錄)을 다시 복원(復元)한다는 이유(理由)를 사전(事前)에 포석(布石)한 것으로서 차식(車軾), 차운로(車雲輅), 차천로(車天輅) 삼부자(三父子)는 차원부설원기(車原雪寃記)를 위서(僞書)할 때 한미(寒微)한 연안차씨(延安車氏) 가문(家門)의 근본(根本)을 미화(美化)하고 위상(位相)을 높이기 위해서 고대(古代) 중국(中國) 헌원(軒轅) 황제(黃帝)의 본성(本姓)을 공손씨(公孫氏)[병인보(丙寅譜 p.60/이하(以下) 병인보(丙寅譜) 생략(省略)]라 하여 성씨(姓氏)의 근원(根源)으로 삼게 되었는데 당시(當時)는 모계사회(母系社會)로 황하유역(黃河流域) 희수(姬水)라는 강가에 살았기 때문에 희수(姬水)라는 성(姓)을 지어 올리고 모후(母后)의 성(姓)을 쫓아 희씨(姬氏:p.60)로 성(姓)을 바꾸어 제위(帝位)에 올라 황제(黃帝)라 불러 내려오다 황제(黃帝)의 현손(玄孫:孫子)이신 하후우(夏后禹:p.61)가 순(舜)임금으로부터 왕위(王位)를 이어받으면서 희씨(姬氏)가 사씨(氏:p.61)로 바꿔 이어온다. 하후우(夏后禹)의 10대손(代孫) 신갑(辛甲:p.63)은 동국(東國)으로 이동해서 평양(平壤)의 일토산(一土山)에서 일(一)과 토(土)를 합(合)하여 왕씨(王氏)로 고치고 이름을 조명(祖明)이라 하였다. 왕조명(王祖明:p.63)의 25세손(世孫) 수긍(受兢:p.65)은 기자조선(箕子朝鮮) 왕(王)의 스승이 되고 다시 58세손(世孫) 왕몽(王蒙:p.69)에 이르러 기자조선(箕子朝鮮) 마지막 왕(王)인 준왕(準王)이 위만(衛滿)에게 쫓기어 마한(馬韓)의 도읍지(都邑地)에 은거(隱居)하게 되는데 왕씨(王氏)가 왕(王)이 된다는 일토초가자왕(一土草家者王:p.69)이란 소문(所聞)이 떠도니 준왕(準王)이 왕씨(王氏)를 모두 잡아 죽이라는 명(命)을 내리자 왕몽(王蒙)은 아들 림(琳)만을 데리고 지리산(智異山)에 피신(避身)한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왕몽(王蒙)에게 신인(神人)이 나타나 성(姓)을 세번 바꾸면 난리(亂離)도 모면(謀免)하고 후손(後孫)들도 크게 번창(繁昌)할 것이라 게시(揭示)하므로 왕자(王字)를 아주 버릴 수 없어 양(兩) 옆을 막아 전씨(田氏)로 하였다가 다시 중간(中間)을 상통하달(上通下達)하여 신씨(申氏)로 고쳤다가 또다시 아래 위 가로 한 획씩을 더 그어 차씨(車氏) 성(姓)이 되었고 이름도 무일(無一)이라 고쳤으며 아들 림(琳)도 신을(神乙:p.70)이라고 고쳤다. [이 때의 전씨(田氏), 신씨(申氏)는 오늘날 전씨(田氏), 신씨(申氏)와 관련(關聯)이 없다] 차무일(車無一:p.70)의 33세손(世孫) 차승색(車承穡:p.74)은 다시 류색(柳穡:p.75)으로 변성(變姓)한다. 당시(當時) 명문(名門) 거족(巨族)이었던 문화류씨(文化柳氏)의 시조(始祖) 대승공(大丞公) 류차달(柳車達)의 가운데 글자 차(車)를 빌려 차씨(車氏)와 연결(連結)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게 하여 왕씨(王氏) 차씨(車氏) 류씨(柳氏) 글자와 이름은 다르지만 뿌리는 같다는 논리(論理)로 조작(造作)하여 왕씨(王氏) 차씨(車氏) 류씨(柳氏)는 중국(中國) 황제(黃帝) 헌원(軒轅) 공손씨(公孫氏)-희씨(姬氏)-사씨(氏)-왕씨(王氏)-전씨(田氏)-신씨(申氏)-차씨(車氏)-양씨(楊氏) [류씨(柳氏)가 숨어 잠시(暫時) 빌려 썼다고 함]로 이어져 류씨(柳氏)의 원파(源派)가 형성(形成)되었다고 황당(荒唐)한 선계(先系)를 조작(造作)하였다.

 

신라(新羅) 진골(眞骨) 귀족(貴族) 사이의 대립(對立)과 분열(分裂)은 후대(後代)로 올수록 더욱 치열(熾烈)하여 진성여왕(眞聖女王) 10年(896)까지 정치적(政治的) 성격(性格)을 띤 반란(叛亂)이 수없이 있었는데 그중 원성왕(元聖王) 7年 아찬(阿飡) 제공(悌恭)의 모반(謀叛)으로 언승(彦昇)이 제공(悌恭)을 살해(殺害)하였다. 연안차씨(延安車氏) 후대(後代) 원파록(源派錄)의 기록(記錄)은 이 모반사건(謀叛事件)을 이용(利用)하여 또 한 번 각본(脚本)에 의한 연출(演出)이 진행(進行)되었다. 신라(新羅) 소성왕(昭聖王)이 799年에 즉위(卽位)하고 이듬해에 죽으니 13歲의 어린 왕자(王子) 애장왕(哀莊王) 청명(淸明)이 왕위(王位)에 등극(登極)하니 아찬(阿飡) 병부령(兵部令)으로 숙부(叔父)가 되는 언승(彦昇)이 섭정(攝政)하였다. 애장왕(哀莊王)의 숙부(叔父) 김언승(金彦昇)이 그의 아우 제옹(悌邕)과 함께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궁궐(宮闕)에 들어와 반란(叛亂)을 일으켜 왕(王)을 시해(弑害)하였다. 왕(王)의 아우 체명(體明)이 왕(王)을 시위(侍衛)하고 있다가 함께 해(害)를 입었다. 헌덕왕(憲德王)이 왕위(王位)에 오르니 이름은 언승(彦昇)이요 소성왕(昭聖王)의 친동생이다. 이것이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記錄)이다.

 

그런데 원파록(源派錄)은 여기에 차승색(車承穡)이 애장왕(哀莊王) 때의 좌승(左丞)으로 등장(登場)하며 쿠데타를 일으킨 헌덕왕(憲德王) 언승(彦昇)을 큰 아들 공숙(恭叔)과 함께 다리 밑에서 죽이려다 실패(失敗)하였다. 헌덕왕(憲德王)은 일천근(一阡斤)의 금(金)과 식읍(食邑)을 상(賞)으로 걸고 체포(逮捕)하려 하자 차승색(車承穡)의 외숙(外叔)인 금생(金生)은 상금(賞金)이 탐이 나서 숨어 있는 조카 차승색(車承穡)을 밀고(密告)하므로서 문화현(文化縣)에 있는 묵방산(墨坊山) 기슭으로 숨어 들어와 살며 조모(祖母)인 양씨(楊氏) 성(姓)을 빌어 살다가 류씨(柳氏)로 변성명(變姓名)하여 살았다는 변양위류(變楊爲柳:p.74~75)의 소설(小說)같은 허구(虛構)의 이야기이다. 더욱 우리를 당혹(當惑)스럽게 하는 것은 차승색(車承穡)의 큰 아들 공숙(恭叔:p.74)을 류씨(柳氏)로 변성명(變姓名)하여 류숙(柳叔:p.75)으로 하고 진부(振阜)-무선(茂先)-보림(普林)-차달(車達:p.75)의 계대(系代)를 만들었고 둘째 아들 공도(恭道:p.74)는 강남(江南)으로 들어가 구성(舊姓) 왕씨(王氏) 성(姓)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복성(復姓)된 왕공도(王恭道)는 작재건(作宰建)-용건(龍建)-왕건(王建)으로 계대(系代)를 만들어 다시 한 번 반전(反轉)해서 국조(國祖) 원덕대왕(元德大王)으로 기록(記錄)하여 고려(高麗)를 개국(開國)한 태조(太祖) 왕건(王建)의 증조(曾祖)로 삼아 차(車)ㆍ류(柳)ㆍ왕씨(王氏) 계대(系派)의 파조(派祖)로 파생(派生)시켜 정사왜곡(政事歪曲)까지로 발전(發展)하여 후대(後代)에 커다란 혼란(昏亂)을 초래(招來)하게 하였다.

 

더욱 황당(荒唐)한 것은 고려(高麗) 태조(太祖) 왕건(王建)이 후삼국(後三國)을 통일(統一)할 때 가성(假姓) 류씨(柳氏) 6世인 류해(柳海)가 장정(壯丁)과 군량(軍糧)을 수송(輸送)하여 통일(統一)에 기여(寄與)했으므로 삼한통합(三韓統合) 벽상이등(壁上二等) 공신(功臣)에 봉(封)했고 조상(祖上)의 성(姓)을 따라 본성(本姓) 차씨(車氏)로 복성(復姓)하고 이름을 달(達)로 사명(賜名)하였고 가성(假姓) 류씨(柳氏) 6世는 본성(本姓) 차씨(車氏)로 복성(復姓)된 것이다. 큰 아들 효전(孝全)은 연안차씨(延安車氏) 득관조(得貫祖)가 되었고 둘째 아들 효금(孝金)은 고려(高麗) 태조(太祖) 왕건(王建)의 명(命)으로 류씨(柳氏)로 사성(賜姓)되어 류씨(柳氏)의 득성(得姓) 시조(始祖)가 되어 이때부터 두 형제분이 차(車)ㆍ류(柳) 두 성(姓)으로 분성(分姓)되었다는 것이 위서(僞書) 원파록(源派錄)의 내용(內容)이다.

 

세계(世界) 최초(最初) 족보(族譜)인 문화류씨(文化柳氏) 영락보(永樂譜)가 세종(世宗) 5年(1423) 양도공(良度公) 류영(柳穎)에 의해 간행(刊行)되었고 박팽년(朴彭年)이 설원기(雪寃記)를 1456年 5月 17日에 찬(撰)했다고 했으나 이는 위조(僞造)이며 하위지(河緯地)가 세조(世祖) 2年(1456) 5月 21日 차원부설원기(車原雪寃記) 서문(序文)을 작성(作成)하였고 남효온(南孝溫:1454)이 임금이 낸 제목(題目)에 따라 신하(臣下)들이 써내는 시문(詩文)인 응제시(應製詩)를 작성(作成)하였다 했다. 이때의 남효온(南孝溫) 나이는 만 2세였다. 과연 2歲의 신하(臣下)가 응제시(應製詩)를 썼을 수 있을까 의문(疑問)이다. 이후(以後) 1562年 류희잠(柳希潛)에 의해 가정보(嘉靖譜)가 발간(發刊)되는데 여기에는 대승공(大丞公) 류차달(柳車達)과 아들 효금(孝金) 이후(以後)만이 기록(記錄)되었다. 1580年 위서(僞書) 차원부설원기(車原雪寃記)가 차천로(車天輅) 주도(主導)로 차식(車軾) 삼부자(三父子)에 의하여 발간(發刊)되는데 그들은 교묘(巧妙)한 발상(發想)과 집요(執拗)한 접근(接近)으로 1562年에 발간(發刊)된 문화류씨(文化柳氏) 가정보(嘉靖譜)에서 상당(相當)한 정보(情報)를 인용(引用)하여 원파록(源派錄)을 조작(造作) 발간(發刊)하였고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생한 1592年부터 1598年까지 6年이 지난 후 1615年 차천로(車天輅)는 59歲로 졸(卒)한다. 그리고 차씨문중(車氏門中)의 누군가가 중국(中國)의 황제(黃帝) 자손(子孫)인 희씨(姬氏), 사씨(氏), 문화류씨(文化柳氏), 연안차씨(延安車氏), 개성왕씨(開城王氏) 오성(五姓)의 원파록(源派錄)을 문화류씨(文化柳氏) 유학(儒學) 류처후(柳處厚) 선조(先祖)에게 제시(提示)하여 설원기(雪寃記) 발간(發刊) 1580年 이후(以後) 109年 만에 조작(造作)과 위조(僞造)로 점철(點綴)된 원파록(源派錄)이 1689年 문화류씨(文化柳氏) 기사보(己巳譜)에 등재(登載)하게 된다. 위서(僞書) 설원기(雪寃記)를 근본적(根本的)인 고증(考證)없이 문화류씨(文化柳氏) 족보(族譜)에 등재(登載)하여 그 이후(以後) 족보(族譜)를 발간(發刊)할 때에는 관행(慣行)대로 발간(發刊)하였고 300여년간(餘年間) 기사보(己巳譜) 이후(以後) 1689年부터 2008年까지는 가공(加工)의 원파록(源派錄)이 문화류씨(文化柳氏) 선대(先代)의 정체성(正體性)이 혼돈(混沌)에 빠지게 했다.

 

이같이 원파록(源派錄)을 조작(造作)한 이유(理由)는 원조(元祖)를 중국(中國) 황제(黃帝)로 하여 가문(家門)의 위상(位相)을 높이고, 성세(姓勢)를 확장(擴張)하고자 하였으며 나라를 잃은 왕씨(王氏)의 왕자(王字)와 차씨(車氏)의 글자 조합(調合)이 쉬웠고, 왕씨(王氏)는 세력(勢力)을 소진(消盡)하고 있었으므로 류(柳)ㆍ차(車) 동원설(同源說)을 조작(造作)하여 류문(柳門)을 차문(車門)에 끌어 안으려는 목적(目的)이 있었기 때문에 문화류씨(文化柳氏) 시조(始祖) 대승공(大丞公) 류차달(柳車達)을 삭제(削除)하여 차씨(車氏)의 시조(始祖)를 대승공(大丞公) 차달(車達)로 변경(變更)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기사보(己巳譜)의 편찬자(編纂者) 류처후(柳處厚)가 원파록(源派錄)에 대해 의심(疑心)하며 신중(愼重)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후대(後代)에 편찬(編纂)된 족보(族譜)에는 아무런 검증(檢證)이나 고증(考證)없이 이 계보(系譜)는 그대로 기록(記錄)되었다. 따라서 황제(黃帝)의 후손(後孫)이라는 인식(認識)을 토대(土臺)로 가문(家門)의 유구(悠久)함을 드러내는 신성화(神聖化)된 이야기가 형성(形成)되어 류차달(柳車達)의 첫째 아들이 차효전(車孝全), 둘째 아들이 류효금(柳孝金)이라는 것이 정설(定說)이 되었고 문헌비고(文獻備考) 卷246, 예문고(藝文考) 5에 박팽년(朴彭年)의 차원부설원록(車原雪寃錄)이 실리게 되었는데 현재(現在) 문화류씨(文化柳氏) 문중(門中)은 설원기(雪寃記)를 위서(僞書)라고 단정(斷定)짓고 문화류씨(文化柳氏)와 연안차씨(延安車氏)의 계보(系譜)를 부정(否定)하였다.

 

차원부설원기(車原雪寃記)의 위작(僞作) 사실(事實)을 말하는 최초(最初)의 자료(資料)로 확인(確認)할 수 있는 것은 몽예(夢) 남극관(南克寬:1689~1714)의 몽예집(夢集) 잡저편(雜著編)에 실린 글을 통(通)해서 인데 그는 몇 줄 되지 않는 글이지만 설원기(雪寃記)의 사리(辭理)가 비루(鄙陋)하여 위작(僞作)되었다고 판단(判斷)하였다. 차천로(車天輅)가 문조(文藻)는 있으나 이에 이르지는 못하였을 것이고 차식(車軾:차원부(車原)의 육세손(六世孫))이나 그 선대(先代)에서 족보(族譜)를 넓히고자 하는 목적(目的) 때문에 성삼문(成三問) 등의 봉교(奉敎)에 기탁(寄託)하여 꾸며낸 것이라 단언(斷言)하였다. 이후(以後) 성호(星湖) 이익(李瀷:1681~1783), 담와(淡窩) 홍계희(洪啓禧:1703~1771), 윤광소(尹光紹:1708~1786), 신재(신齋) 황윤석(黃胤錫:1769~1791), 지호(芝湖) 이선(李選:1522~1589) 等이 위서(僞書)로 지목(指目)하였고 2000年代에 채하(彩霞) 류주환(柳朱桓) 교수(敎授), 이수건(李樹健) 교수(敎授), 이수환(李樹奐) 교수(敎授), 김난옥, 박은정 等이 위조(僞造) 위작(僞作) 위서(僞書)의 실체(實體)를 연구(硏究)하여 적나라(赤裸裸)하게 지적(指摘)하였다.

 

2. 원파록(源派錄) 삭제(削除)의 변(辯)

우리 문화류씨(文化柳氏)의 족보(族譜)를 편수(編修)함에 있어 편수위원회(編修委員會)의 결의(決議)와 대종회(大宗會)의 인준(認准)에 의하여 원파록(源派錄)을 삭제(削除)하고 오직 그 최초(最初)에 실린 기사보(己巳譜)의 원문(原文)을 그대로 영인(影印)하여 예전 그 자리에 보존(保存)하는 바, 이를 삭제(削除)함은 그 기록(記錄)이 경위(經緯)에 맞지 않은 때문이요, 보존(保存)하는 것은 그 기록(記錄)을 근거(根據)로 삼기 위함이다. 이는 조선(朝鮮) 말엽(末葉)부터 세보(世譜) 문헌편(文獻編)에 실려 있었는데 기록(記錄)이 허구(虛構)함이 넘치고 말이 번거로움이 심하여 위로부터 아래까지 수천(數千) 년간(年間) 모든 사적(事蹟)을 보기가 어제 일을 보는 것 같고 듣기가 오늘 아침의 사적(事蹟)을 듣는 것 같은 바, 가령(假令) 기혈(氣血)을 받고 태어난 후손(後孫)들이라도 오히려 그를 위본(僞本)으로 의심(疑心)이 많겠으니 이 어찌 까닭이 없겠는가? 이를 깊이 연구(硏究)하게 된 발단(發端)은 지난 정축(丁丑:1997)에 연안차씨(延安車氏)들이 대전(大田) 안영공원(安永公園)의 한 모퉁이에 그들의 유래비(由來碑)를 세운 바, 비석(碑石) 안에 원파록(源派錄)에 의거(依據)하여 우리 류씨(柳氏)를 폄훼(貶毁)한 글이 있는데 우리 류씨(柳氏)를 가성(假性)이라 이르고, 시조(始祖) 대승공(大丞公) 류차달(柳車達)을 차해(車海)라 고치고 2世 좌윤공(佐尹公) 효금(孝金)을 문화류씨(文化柳氏) 시조(始祖)라 하고, 이 밖에 류씨(柳氏)를 헐뜯는 等 여러 말은 숙손무숙(叔孫武淑)이 공자(孔子)를 폄훼(貶毁)한 것과 같았다.

 

또 갑신(甲申:2004)에 그들이 족보(族譜)를 간행(刊行)하면서 그 유래비문(由來碑文)을 중(中), 일(日), 독(獨), 불어(佛語) 等 5개국어(個國語)로 번역(飜譯) 해석(解釋)하여 그 책머리에 올려 가까이는 역내(域內)에 반포(頒布)하고 멀리는 해외(海外)에 전파(傳播)하여 온 세상(世上)의 이목(耳目)을 바꾸고자 한 바, 그 심지(心地)의 사악(邪惡)함과 모사(謀事)의 졸렬(拙劣)함은 그 분수(分數)를 헤아리지 못한 것으로 가소(可笑)로울 뿐이다. 그리고 이것으로도 부족(不足)하여 우리 영락(永樂), 가정(嘉靖) 양보(兩譜)를 또한 주먹으로 치고 발로 짓밟듯 여지(餘地)없이 배척(排斥)한 바, 해동(海東) 족보(族譜)의 효시(嚆矢)라 일컫는 것과 비교(比較)해 볼진대 어찌 그 하늘과 땅처럼 서로 다른가? 눈으로 가히 볼 수 없고 귀로 가히 들을 수 없는 바, 그 공교(工巧)로운 말이 앵무새보다 지나치고 사악(邪惡)한 뜻이 도깨비에 가까워 저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하는 것보다 더 간사하였다.

 

이에 동년(同年) 8月에 우리 대종회(大宗會)에서 긴급(緊急)히 대책회의(對策會議)를 열어 저들의 방자(放恣) 흉악(凶惡)함이 날로 심하여 형세상(形勢上) 그대로 둘 수 없다 하고 난상토론(爛商討論)한 끝에 여러 의논(議論)이 하나로 모아져 이르기를『차문(車門)의 주장(主張)이 정녕 사실(史實)이라면 마땅히 승복(承服)하는 것이 옳거니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철저히 대응(對應)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었다.

 

곰곰 생각건대 사람의 자손(子孫)된 자(者)로서 남이 자기 할아버지를 무망(誣妄)하는 것을 보고도 변명(辨明)할 줄 모른다면 아들을 두고 손자(孫子)를 둔들 장차(將次) 무엇에 쓰겠는가? 남의 능욕(凌辱)을 중지(中止)시키는 데는 증거(證據)를 세우는 것이 최선(最善)인 바, 공사가문헌(公私家文獻)으로 우리 류씨(柳氏)의 유래(由來)와 관련(關聯)이 있는 것을 널리 수집(蒐集), 심층(深層) 탐구(探究)하고 정밀(精密) 분석(分析)하여 글 한편을 만들어 종보(宗報)에 등재(登載)하였으니 실로 이는 한편으로는 종인(宗人)들에게 두루 알리는 자료(資料)를 삼고, 한편으로는 차문(車門)의 소요(騷擾)에 대한 조목조목 분별(分別)의 증거(證據)를 삼기 위함이라. 그러나 결코 감정(感情)에 치우치지 않고 오직 논리(論理)를 세워 기술(記述)한 것과 증빙문헌(證憑文獻)을 동봉(同封) 우송(郵送)하여 시정(是正)을 촉구(促求)하였다. 그 후(後) 수차(數次) 회의(會議)에서 종합(綜合) 토론(討論)한 바, 소위(所謂) 차모설원기(車某雪寃記)와 강보원파록(江譜源派錄)은 전혀 역사적(歷史的) 증거(證據)가 없는 것인데 오히려 우리 선세(先世)에 모화사상(慕華思想)에 젖어 들어 그 말을 맹신(盲信)하고 후인(後人)들 또한 선인(先人)의 유서(遺緖)라서 맹종(盲從)함으로 이에 이르러 저들이 그 시기(時期)를 틈 타서 또 날조(捏造)하고 또 왜곡(歪曲)하여 1을 10으로 더하고 10을 100으로 불린 것이다. 곰곰 생각건대 이름을 고치고 성(姓)을 바꾸기 수(數) 천년(千年)동안 부인(婦人)도 없이 독신(獨身)으로 백대(百代)를 전한다는 것이 어찌 있을 만한 일이라 이르겠는가? 지금에 이르도록 세간(世間)에서 아는 류씨(柳氏)와 차씨(車氏)가 동조이성(同祖異姓)이라는 말은 실로 근거(根據)없는 거짓이요 잘못된 전설(傳說)이다. 이제 모욕(侮辱)을 막고자 함에 있어 실로 이 기록(記錄)을 삭제(削除)하는 것보다 우선할 것이 없고 또한 성인(聖人)도 일찍이 의자궐지지훈(疑者闕之之訓)이 있다. 곧 의심(疑心)되는 것은 빼라는 교훈(敎訓)이 있었는데 우리가 오늘날 모욕(侮辱)을 막는 때에 이르러 어찌 성인(聖人)이 이른바 의심(疑心)되는 것을 빼라는 말씀을 따르지 않겠는가? 더욱이 분명한 증거가 있는 바, 근래 들으니 영남대학교(嶺南大學校)에 이수건(李樹健) 교수(敎授)가 있어 사학(史學)으로 일세(一世)의 추중(推重)을 받는 분으로 그 논문(論文)에 이른 바『조선시대(朝鮮時代) 신분사(身分史) 관련(關聯) 자료(資料) 조작(造作)』이란 글이 출현(出現)하였는데 그 가운데「차모(車某)의 설원기(雪寃記)는 그 후손(後孫) 이재(齋) 삼부자(三父子), 곧 이재(齋) 식(軾)과 그 아들 오산(五山) 천로(天輅)와 창주(滄州) 운로(雲輅)의 공저(共著)라.」이른 말이 있다.

 

이로써 볼진대 원파록(源派錄)을 삭제(削除)하고 삭제(削除)하지 않음은 사리(事理) 판단(判斷)에 밝았던 공자(孔子)의 제자(弟子) 자공(子貢)의 변명(辨明)을 기다리지 않고도 저절로 결정될 것인 바, 우리 대승공(大丞公)의 후손(後孫)된 자 스스로 반성(反省)하는 자리에 있어 류씨(柳氏)와 차씨(車氏)가 근원(根源)이 한가지라는 말은 점점 후인(後人)의 입에서 없어질 것이니 성인(聖人)의 의심(疑心)되는 것은 빼라는 경계(警戒)의 의의(意義)를 어찌 가볍게 이르겠는가? 저들이나 우리를 논할 것 없이 사실(史實)을 왜곡(歪曲)할진대 선조(先祖)를 욕(辱)되게 하고 후손(後孫)을 속인다는 기롱(譏弄)과 세상(世上)을 미혹(迷惑)시키고 사람을 속이는 죄(罪)를 면하지 못할 것이니, 더욱 조심하고 더욱 경계해야 할 것이다. 차문(車門)에서 소요(騷擾)를 일으킨 지 10年만인 정해년(丁亥年:2007)에 드디어 양성(兩姓)이 한 자리에서 친목(親睦)을 다지던 모임이 깨지고 각기(各其) 본래(本來)의 처지(處地)로 돌아간 바, 기분(氣分)의 상쾌함이 장마에 갠 날을 얻은 것 같고, 마음의 통쾌함이 가뭄에 비를 얻은 것 같다. 이 상쾌하고 유쾌함이 마땅히 길이 전할 일로서 오직 원하는 바, 여러 종친(宗親)들은 함께 그 뜻을 힘쓰고 함께 그 힘을 다하여 오늘날 이 글을 삭제(削除)하는 의의(意義)를 계속 지켜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문화류씨세보(文化柳氏世譜) 무자보(戊子譜) 2008.]

 

2012年(壬辰) 12月 31日

晉州柳氏大宗會

晉州柳氏世譜 編纂委員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