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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사헌공 류경종(大司憲公 柳慶宗)

       (명종20년~인조 1년, 1565~1623)        

 


 

공은 명종 20년(1565) 증 좌찬성 선공감역 류전(繕工監役 柳銓)과 진사 민기무(閔起武)의 딸 여흥민씨(麗興閔氏)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선원(善元), 호는 연호(燕湖이다. 조부가 증 좌승지선무랑 희택(宣務郞 希澤), 증조가 증 좌통례 홍(洪). 고조가 사헌부감찰 명원(命源)이다. 고려조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신(節臣)인 안간공 혜손(安簡公 惠孫)과 수재공 향(守齋公 珦) 부자가 8대조와 7대조이다. 공의 외증조부는 민기문(閔起文 : 1511~1574)은 약관 21세에 사마시에 합격, 대과 합격 뒤 홍문관 직제학과 우승지를 역임하였으며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공의 배의는 두 분인데 첫 배의는 생원 홍택(洪澤)의 따님인 남양홍씨(南陽洪氏)이고 후 배위는 부정 유몽표(副正 柳夢彪)의 따님인 흥양(興陽:高興이라고도 함)유씨이다.

 

공은 25세가 되던 선조 22년(1589)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임진왜란 중이던 선조 28년(1595) 12월 별시문과에 급제하였다. 공의 나이 서른한 살이었다. 이 별시에서 18명을 선발했는데 공은 을과 1위로 전체 3위를 찾이하였다. 공은 승문원 정자(正字)를 거쳐 선조 29년(1596)에 예문관 검열, 승정원 주서를 선조 30년(1597)에 예문관 대교와 봉교를 역임하였다. 공은 임진왜란이 끝나던 해인 선조 31년(1598)에 첫 외직인 함경도 도사(都事)로 나가게 된다.  선조32년(1599) 5월 사간원에 임명되고 11월에 헌납으로 승진했다. 선조 33년(1600) 4월 1일 공은 정언 박사제(朴思齋) 등과 함께 대북파를 영도하던 병조판서 홍여순(洪汝諄)을 비릇한 권신을 탄핵했다. 선조 37년(1604) 예조좌랑에 임명되었으나 1개월 뒤 평안도 평사라는 외직으로 나가게 된다. 선조 38년(1605) 5월에 병조정랑에 임명되었다. 공은 춘추관 기주관(春秋館 記注官)을 겸하며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린 선대실록 재간행 작업에 참여하였다. 임진왜란 전 춘추관 성주(星州)에 분장되어 있던 선대조의 실록은 모두 불타버리고 오직 전주(全州)에 소장되어 있던 실록만이 병화를 면했다. 선조 38년(1605) 11월에는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다. 선조39년(1606) 4월 성절사 서장관으로 북경에 다녀온 뒤인 선조 40년(1607) 4월 병조정랑에 다시 임명되었다. 9월에는 사헌부 장령으로 옮겼다. 공은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곧 바로 사헌부 장령에 복직되었다. 광해군 즉위년 2월 17일의 일이였다. 그해 7월에 헌납으로 8월에는 사간에 임명되었다. 공은 광해 1년(1609)1월 14일 세자시강원의 필선(弼善)을 겸한다. 이로써 공은 광해군 부자의 교육에 모두 참여한 것이다. 이후 공은 사헌부 집의 동부승지. 우승지 등을 겸임했다. 이 사이 호패청(戶牌廳)이 팔도 안무사를 정할 때 공은 함경도 담당이었다. 공이 광해군 4년(1612) 11월 량전(量田)과 같은 중요 임무를 맡는 충홍우도(忠洪右道)의 균전사(均田使)에 임명되었으나 광해군은 측근의 자리에 있으니 다른 사람을 보내라고 할 정도로 공에 대한 각별한 신임을 나타냈다. 공이 광해군 5년(1613) 2월 외직인 황해관찰사에 임명되어 임지로 떠날 때 광해군은 공을 불러 “황해도는 인심이 극히 흉악하여 역번이 자주 일어나니 기찰(譏察)하라고 하였다. 공은 황해관찰사를 마친뒤 광해군 6년(1614) 이후 대사간, 대사헌, 동지중추부사 등 요직을 역임했다. 공은 광해군 6년(1614) 9월, 광해군 10년(1618)12월 등 3차례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광해군 7년(1615) 12월 왕으로부터 반숙마(半熟馬)1필을 하사 받았다. 공은 광해군 11년(1619) 병조참판에 임명 대사헌직에서 물러났다. 다음해에 5월 11일 비서실장격인 승정원 도승지에 임명되었다. 공은 인조원년((1623) 인조반정에 고변 사건으로 연류되어 비명에 별세하였다.

승정원일기에는 국청에서 혹형을 받던 10월 17일 타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공은 과천(果川) 수리산 백목동 선영에 모셔졌다가 1959년 개발되면서 부여군 은산면 옥가동 후록 임좌(壬坐) 언덕으로 이장되었다. 이장시 유품이 많이 나와 국립부여박물관에 기증했다.

 

참조문헌 : “선조실록„ “광해군일기„ “인조실록„ “승정원일기„ “열려실기술„ “조야집요(朝野執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