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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구당공 류지화(伴鷗堂公 柳志和)

       (선조33년~숙종33년(1599~1680)        

 


 

공은 선조33년(1599) 11월 10일  주부 류광복(主簿 柳光復)과 승지 홍치상(承旨 洪致祥)의 따님인 남양홍씨의 외아들로 전라도 만경현(萬頃縣:전남 김제군)에서 태어났다. 자는 후성(後聖), 호는반구당(伴鷗堂)이다. 조부는 첨지중추부사 희춘(喜春), 증조는 별좌 한(別坐 垾), 고조는 신령현감 종숙(宗淑)이다. 고려말 충신 안간공 혜손(安簡公 惠孫)의 7세손으로 현감공 진(瑱)의 넷째 아드님인 신령현감 의(誼)의 5세(世)손이다. 공은 12세의 어린나이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이 나이에도 3년상을 끝마칠 때까지 움막에서 시묘살이를 하였다. 공의 이러한 효성과 높은 학행이 널리퍼져 이를 알게된 전라감사는 공을 조정에 추천하여 인조11년(1633년)에 창능참봉(고양시 서오능 왕릉)에 임명되었다.

 

이때 공의 나이35세였다. 3년후인 인조 14년(1636)에는 선공감 봉사를 거쳐 상의원 주부(尙衣院 主簿)에 승진되었고 그후 군기시 주부(軍器寺 主簿)에 임명되었고 회덕(懷德)현감(縣監)으로 부임되었다. 이곳에서 현민들에 의해 그 치적을 칭송하는 선정비가 세워졌다.

 

그러나 공은 회덕현감을 끝으로 더 이상 관직에 나가지 않았으며 시골로 낙향하여 그 후 반구당(“伴鷗“는 갈매기의 벗이 된다 란 뜻이다)이란 아호 그대로 자연을 벗삼아 시문을 즐기며 유유자적 하였다. 공은 좌의정 우암 송시열(尤庵 宋 時烈). 이조판서 동춘당 송준길(同春堂 宋浚吉). 우의정 만암 이상진(晩庵 李尙眞). 우의정 수촌 오시수(水村 吳始壽). 백의정승 명재 윤중(明齋 尹拯). 지평 백석 류즙(白石 柳楫 : 전주인). 우의정 도촌 정유성(陶村 鄭維城) 등과 인간적으로 깊은 고유관계를 유지해 왔다. 벼슬은 비록 종6품의 현감직으로 끝났으나 도학을 더 우위에 두는 당시에 시대적 가치관으로 볼 때 학덕높은 대학자로서 존경받는 공의 고매한 인격과 학문적 깊이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동춘당 송준길은 주변사람들에게 공을 평하여 “우리고을 성주는 봄바람과 같이 화기가 감도는 군자지상(君子之相)”이라 했고 우암 송시열은 공의 만장(輓章)에 “그대와의 오랜 친교는 참으로 행복하였네, 도덕이 쇠퇴한 때에 어진군자를 만났으니 너그럽고 인자함은 타고난 성정이요. 참으로 하늘이 낸 충신과 효자였네”라 하며 충효쌍정(忠孝雙旌)을 칭송하였다. 또한 만암 이상진은 “세상에 완전한 이는 드문 것인데 공과 같이 훌륭한 분이 몇이나 될꼬, 벼슬은 하늘이 낸 효심에서 비릇되었고 어진이가 장수함을 공이 증험하였네”라는 만시(輓詩)를 지었다. 공에 대한 찬사와 높은 평가는 많지만 앞서의 글귀만으로도 공의 인품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공은 숙종6년(1680) 10월 26일 남한산성의 충정과 호종의 공로로 정3품 통정대부 가자(加資)를 보지 못한 채 생을 마치니 향년82세였다. 숙종33년(1707)에 대제학 송상기(宋相琦)가 지은 묘비명으로 비가 세워지고 정조 22년(1798)에는 당대에 석학인 문헌공 홍양호(文獻公 洪良浩)의 서문을 받아 반구당 문집(伴鷗堂文集)을 발간하였다. 이어 고종7년(1870)에 7세손 환창등이 “반구당유고(伴鷗堂遺稿)”를 편집, 간행하였다.

 

책 머리에 반구당 문집에 실려있던 홍양호(洪良浩)의 서문이 있고. 책 끝에 7세손 환권(煥權)과 조석우(趙錫雨)의 발문이 있다. 권 1에 시56수. 권2에 서(書)12편. 찬(贊). 행장. 제문 각각 1편. 부록으로 기성동취록(箕城同醉錄) 1편, 만장 5수, 제반구당벽상(題伴鷗堂壁上) 2수, 간서(簡書) 14편, 행장,묘갈문, 충효쌍정찬(忠孝雙旌贊), 강당상량문(講堂上樑文). 충효쌍정정려상량문 . 사우봉안축문(祠宇奉安祝文, 가장(家狀), 유허기(遺噓記) 각1편, 권3은 통문(通文)14편, 장사(狀辭) 7편, 충효쌍정운 33수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3권 2책으로 목활자본이며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있다.

 

순조 4년(1804)에는 공의 충절과 효성이 높이 평가되어 충효쌍정문(忠孝雙旌門)의 은전(恩典)이 내려졌다. 순조 12년(1812)에는 조정으로부터 남산서원(南山書院)건립을 윤허받은 유림이 이를 건립하여 공을 주벽(主壁) 으로 봉안 제향하게 되었다.

 

참조문헌 : 「순조실록」 「반구당공실상집」 「충효쌍정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