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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혜정공 류 엄(惠靖公 柳 儼)

       (1692~1752)        

 

 

공의 자는 숙첨(叔瞻), 호는 성암(省菴) 또는 화악(花岳)이며, 시호는 혜정(惠靖)이다. 공은 유신(儒臣)으로서 나라에 충성하고 가정에서는 독자로서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한 인물로 널리 알려졌다. 중종 대에 정국1등공신으로 영의정을 지낸 청천부원군 문성공 순정(順汀)의 11대 종손이다. 아버지 진계군 정진(晉溪君 挺晉)과 어머니 반남박씨(潘南朴氏)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외손녀이다. 1721년(경종1)에 광릉참봉으로 벼슬을 시작하였고, 1723년(경종3)에 문과에 급제한 이후 1727년(영조3)까지 사간원 정언과 사헌부 지평으로 재직하면서 간관(諫官)으로 활약하였다. 1728년에는 홍양 현감이 되었는데 당시 토적이 병사를 살해하고 거짓으로 여러 고을에 관문을 보내자 공은 즉시 관문을 찢고 사령을 베고 성을 굳게 지켰다. 이 때문에 임금으로부터 무재(武才)가 훌륭하다고 칭송을 받았다. 그해에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문학, 헌납, 수찬, 부교리, 교리, 집의, 부응교, 대사간, 우부승지를 두루 지냈다. 1729년 천추절(임금의 생일을 기념하던 날)을 맞이하여 왕실의 만수무강을 비는 차자(箚子)를 올려 왕으로부터 근사록(近思錄) 한 질을 상으로 받았다. 또 그해에 시독관으로 있으면서 외방사찰의 요승을 엄단하여 사찰의 정화를 단행하였다. 1730년 숙묘보감 춘추관 편수관과 관무재 어사를 지냈고, 1731년에는 외직으로 광주부윤이 되었다가 이듬해에 전라감사를 역임하였다. 1733년에 다시 중앙으로 들어와 승지, 대사간을 지내고, 이듬해에 형조참의, 수원부사, 1735년에 충청도 관찰사, 1737년에 좌우부승지를 지내면서 주청부사(奏請副使)로 중국을 다녀왔으며 청양군에 봉군되고 이어서 도승지에 임명되었다.

 

1741년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삼년상을 마친 이후에 대사헌, 황해도 관찰사를 지냈다. 1744년 경기도 관찰사, 공조판서를 지내고, 1745년에 형조판서, 지의금부사, 이듬해에 한성부 판윤, 1748년에 대사헌, 이듬해에 지의금부사, 예조판서를 지냈고, 1750년에 공조판서로 있으면서 자헌대부 청양군(菁陽君)에 봉해졌다. 1751년 존숭도감 제조로 있으면서 공로로 임금으로부터 안구마 1필을 하사받았다. 그해에 책례도감 제조, 형조판서로 재직하였다. 그해 십이월 예조판서로서 원접사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주청부사로 중국을 다녀오고 나서부터 내내 건강이 좋지 않다가 왕세손(의소세손)의 상 때에 한데서 밤을 새우다가 병이 더하여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1752년 4월에 향년 61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이에 영조는 전교를 내려서 공의 업적을 칭송하고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장례를 후하게 치르도록 하명하였다. 임금이 전교를 내리시길 “ 청양군 엄은 유신으로 내 곁에 가까이 있으면서 나를 오래도록 섬기고, 나라를 위해 충성하였다. 내가 항상 가상히 여겼건만, 이제는 세상을 떠났도다. 슬프고 애통하여 무얼 말하리오. 지금 비록 한 달이 지났으나 내 어찌 차마 침묵하리오.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상례와 장례에 소요되는 모든 물자를 넉넉히 지급하여 내 뜻을 보여주라”고 하였다.

 

공은 영조의 탕평정치의 근본정신에 입각하여 불편부당의 의론을 자주 내어 임금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다. 탕평에 반대하는 노론을 공격하는 것은 물론 소론과 심지어 그와 함께 탕평을 지지하는 동조세력까지도 시시비비를 가려 비판할 정도였다. 공은 진정한 의미의 탕평정치가 구현되도록 힘썼는데 임금인 영조마저 탕평정치에서 벗어날 때에는 이를 지적하는 직언도 서슴지 않았다. 영조실록에 의하면 영조가 노론을 일변인(一邊人-어느 한 편 사람)이라 한데 대하여 탕평을 추진한다고 하면서 당파를 따지는 것은 실언(失言)이라며 임금의 이중적 자세를 지적하였다. 이에 대해 영조는 “대관의 말이 옳다. 이제 부터는 일변인이란 세 글자를 마땅히 입에서 끊고 말하지 않겠으니, 아랫사람들도 내 뜻을 본받아야 한다.”며 공의 직간을 흔쾌히 인정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공은 시문에 능하여 당대에 문장으로도 명성이 높았으며 여러 저술이 남아있는데 대표적인 것은 중국에 사신으로 가면서 지은 시를 기록한 연행연구첩(燕行聯句帖), 경서와 사서의 내용을 집대성 한 성암오편(省菴五編), 시(詩), 부(賦), 만사(輓詞) 등을 엮은 화악만록(花岳謾錄), 그리고 관직생활 중의 일기인 반대록(鞶帶錄) 등 많은 저술이 있는데 2004년에 서울 역사박물관에 기증되었다. 공은 당대의 유명 시인 사천 이병연(李秉淵),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 정선(鄭敾)과 시를 주고받을 정도로 교분이 두터웠다.

 

공은 또한 부모에게 효도를 다한 인물로도 널리 알려졌다. 누이도 없는 독자였는데, 불행히도 18세에 아버지를 일찍 여의였다. 그렇지만 편모를 봉양하기를 지극히 하였다고 한다.

 

배위는 여산송씨(礪山宋氏)로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는데 의금부 도사를 지낸 큰 아들은 성제(聖躋)이고 둘째아들은 북부봉사를 지낸 성지(聖趾)인데 이 두 아들도 아버지처럼 지극한 효자로 널리 알려져 부자간의 효성은 조정에 까지 알려져서 임금과 신하들에 의해서 널리 칭송되었다.

 

참고 문헌 : 영조실록, 증보문헌비고, 청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