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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장공 류림(忠壯公 柳琳)

       (선조14년~인조21년, 1581~1643)        

 

 

公은 선조 14년(1581) 2월 증이조참판 청하현감 류회(淸河縣監 柳淮)와 사평 박년(司評 朴恬)의 따님인 음성박씨의 3남2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字는 여온(汝溫)이고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조부는 정민공 진동, 증조는 증좌참찬공 한평, 고조는 증예조참판 사예공 자문이다. 충경공 형(忠景公 珩)이 종형(從兄)이다. 公은 10세에 조실부모(早失父母)하여 졸지에 천애고아가 되어 임진왜란 때에 명량과 노량해전에서 큰 功을 세운 충경공을 쫓아 무인의 길을 걸었으며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에 김화대첩(金化大捷)을 지휘하여 조선군이 유일하게 승리한 대첩이다. 公은 광해군 5년(1613) 이성현감, 광해군 9년(1617) 이산군수로, 광해군 10년(1618) 충청수사로 나가 수영의 관리체계를 혁신한 功으로 가선대부로 품계가 올랐다. 광해군 11년(1619) 4년 전 황주성 축성을 지휘감독하다 진중에서 숨진 公의 從兄인 충경공의 마지막 직책인 황해병사에 임명되어 황주성 축성을 마무리하였고 광해군 13년(1621) 11월 북병사(함경북도병사)에 임명되었으나 인조반정으로 부임하지 않고 인조 1년(1623) 장흥부사와 남양부사를 거쳐 남한산성 축성을 위해 광주목사에 임명되었다. 인조 2년(1625) 2월 서산군수로 전임되어 충청병사, 전라우수사, 좌수사를 거쳐 평안병사에 임명되었으나 인조 9년(1631) 풍토에 적응하지 못한 처자를 성 밖에 나가 살게 한 것을 대간이 문제 삼아 선천(宣川)의 검산(劍山)으로 유배되었으나 인조 11년(1633) 영변부사로 임명되어 약산 동대(藥山 東臺)에 城을 쌓았으며 북방정세가 악화되자 인조 12년(1634) 평안병사에 재임명되었다. 인조 13년(1635)에 부총관 겸 포도대장에 임명되었고 인조 14년(1636) 경상좌병사에 임명되었으나 북방의 상황이 심상치 않자 세 번째 평안병사에 임명되었다. 결국 公은 평안병사로서 병자호란을 맞게 되었다.

 

후금의 태종은 1635년 내몽고를 평정한 뒤 국호를 청(淸)으로 하고 명나라를 치기에 앞서 조선을 침공하기에 이른 것이다. 청나라 군 12만8,000명이 심양에 집결하여 선봉부대가 압록강을 도하, 의주를 지나 안주방면으로 남하하였다. 公이 지키고 있던 안주성에는 청 태종(淸 太宗)이 이끄는 7만 명의 본대(本隊)가 다가왔는데 公의 휘하에는 3,000명의 병력만이 있을 뿐이었다. 적의 병력이 23배가 넘자 기만작전으로 성벽에 세워둔 기치(旗幟)를 모두 눕힌 다음 정숙을 유지하여 청 태종이 그대로 지나치게 한 후 청군(淸軍)을 추격하여 평양방면으로 남하, 평양성에서 평안감사 홍명구와 합류하여 김화(金化: 철원북부의 강원지역) 방면에서 청병(淸兵)과 싸웠는데 홍명구는 평야지대에 진을 치고 公은 삼면(三面)이 깎아지른 경사진 고지에서 싸우다 홍명구는 전사했다. 이것이 병자호란 당시 조선군이 유일하게 승전한 김화대첩이다. 公의 병력은 남한산성으로 진군을 계속하여 가평에 도착하였으나 화의(和議)가 성립하는 바람에 한양성 밖에 머무르다 조정의 명(命)을 받고 다시 안주로 돌아갔다. 김화대첩은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압도적으로 우세한 적의 병력을 격퇴하고 병력의 손실 없이 승리했다는 점에서 임진왜란 당시의 명량대첩에 비견(比肩)될 수 있다. 公은 인조 16년(1638) 평안병사에 다시 임명되었고 인조 17년(1639)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었다가 인조 19년(1641) 다시 평안병사에 임명되었다. 公이 귀국하자 임금이 친히 불러 위로하고 좋은 모자를 하사하고 자헌대부 지중추부사로 품계를 올려 총융사에 임명하였다. 인조 20년(1642) 다시 통제사에 임명된 公은 병세가 깊어져 인조 21년(1643)에 포도대장으로 올려 졌으나 임명장을 받기도 전에 별세하니 향년 63세였다. 公은 사후(死後)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정조 20년(1796) 충장(忠壯)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김화 유림(金化 儒林)에 의해 충렬사가 건립되어 홍명구와 함께 제향(祭享)되었고 김화 격전지에 대첩비가 세워졌다.

 

배위는 선전관 윤기빙의 따님인 함안윤씨이고 후배위는 참봉 김흔의 따님인 안동김씨이다. 슬하에 3남2녀를 두었다. 원걸(元傑)과 진주인 현감 강원희에 출가한 딸은 윤씨 소생이고 지방(之芳)과 지발(之發), 그리고 월사 이정구의 손자인 이조판서 연안인 이익상에게 출가한 딸은 안동김씨 소생이다. 지방과 지발은 모두 문과 급제하여 각각 목사와 참판을 지냈다. 묘소는 고양시 행신동 선영 세장지에 모셔졌다.

 

참고문헌 : 「광해군 일기」, 「인조실록」,  「병자호란사」, 「중정남한지」, 「신도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