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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경공 류형(忠景公 柳珩)

       (명종21년~광해군7년, 1566~1615)        

 

 

公은 조선조 명종 21년(1566) 4월 6일 증병조판서 류용(柳溶)과 목사 임구령(牧使 林九齡)의 따님인 선산임씨(善山林氏) 사이에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字는 사온(士溫), 號는 석담(石潭), 시호(諡號)는 충경(忠景)이다. 조부가 정민공 진동(貞敏公 辰仝), 증조가 증좌참찬공 진사 한평(漢平), 高祖가 증예조참판 사예공 자문(司藝公 子文)이다. 부자 2대(父子 二代)가 청백리에 녹선된 정평공 구(靖平公 玽)와 청백리공 겸(淸白吏公 謙)이 각각 7대조(七代祖)와 6대조(六代祖)이며 병자호란丙子胡亂 김화대첩(金化大捷)에서 功을 세운 충장공 림(忠壯公 琳)이 종제(從弟)이고 孝宗의 북벌계획(北伐計劃)에 참여한 야당공 혁연(野堂公 赫然)은 친손자이다. 公은 효성이 지극하여 병석에 누운 어머니가 잡숫고 싶어 했던 꿩고기를 대접하지 못한 것이 恨이 되어 평생 꿩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다.

 

公은 27세이던 선조 25년(1592) 4월 임진왜란(壬辰倭亂) 다음해에 음사(蔭仕)로 선전관(宣傳官)이 되어 선조 27년(1594) 무과 별시(武科 別試)에 합격한 후 사격대회(射擊大會)에서 범상치 않은 용모와 활솜씨를 보고 선조가 나라에 충성하여 선조를 욕되게 하지 말라는 분부를 하자 이에 감격한 公은 등에 진충보국(盡忠報國)이라는 네 글자를 입묵(入墨)하여 충성을 다짐하였다. 선조 29년(1596) 해남현감(海南縣監)에 부임한 것이 公의 생애에 큰 의의를 갖는 것으로 정유재란(丁酉再亂, 1597~1598)격전지의 한 복판에 서게 되었으며 이순신장군의 휘하에 들어가게 된 계기가 되었다. 정유재란 2년간의 주 전투지역은 전라도 남해안과 경상도 해안선 일대로 제해권 확보(制海權 確保)를 위한 해상전투가 많았는데 바로 이 시기에 해남현감으로 있으면서 전란(戰亂)을 틈탄 지방토호(地方土豪)들의 방자한 행동과 횡포를 엄히 다스렸으며 군량미(軍糧米) 50석을 보급하는 등 탄탄한 대비로 해남현(海南縣)과 진도 사이의 울둘목(鳴梁海峽)에서 12척의 배로 133척을 무찌른 명량대첩의 신화를 이룰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고 아군 지휘관들이 11배가 넘는 적선 133척의 기세에 눌려 주춤할 때에 여러 차례 돌격을 감행하여 승세로 이끌었고 충무공 휘하의 선봉장으로 전쟁이 끝나는 순간까지 많은 전공을 세웠다.

 

난중일기(亂中日記) 무오년(戊戌年, 1598) 10월 2일 “류형(柳珩)이 탄환을 맞았으나 죽지는 않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동년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는 총탄 6발을 맞아 부상이 심각한 것을 깨달은 충무공이 “이제 큰 계책을 이루기는 다 틀렸구나.” 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이충무공(李忠武公)이 독전(督戰)하다 총탄에 맞아 숨진 것은 바로 이 이후의 일이다. 公은 임진왜란 이후 충청수사, 전라우수사를 거쳐 선조 35년(1602) 36세의 나이에 삼도수군통제사로, 선조 38년(1605) 여진족 침범을 대비해서 회령부사로, 선조 40년(1607) 함경도 북병사에, 광해군 원년(1609) 평안병사로 남북변방을 전전하면서 격무에 시달린 公은 광해군 3년(1611)에 중풍으로 쓰러졌다. 소식을 들은 광해군은 “류형이 나랏일을 돌보느라 고생했는데 마음이 아프다. 명의를 빨리 보내 치료하게 하라”는 전교(傳敎)를 내리기도 했다. 광해군 4년(1612)에는 명・청 교체기(明・淸 交替期)로 대륙정세(大陸政勢)가 급박해져 이를 대비하기 위해 황해병사에 임명되었다. 광해군 7년(1615) 2월 황주성 축성(黃州城 築城) 공사장을 순시 중 쓰러져 2월 25일에 진중에서 순직하니 향년 50세였다. 公은 진충보국(盡忠報國)의 업적으로 선무원종 1등 공신(宣武原從 一等 功臣)을 내리고 정헌대부 병조판서(正憲大夫 兵曹判書)로 증직 추서(贈職 追敍)하였고 인조 때 순충적덕보조 1등 공신(純忠積德補祚 一等 功臣)에 의정부 영의정(議政府 領議政)으로 추증(追贈)되었으며 정조 때에 충경(忠景)의 시호(諡號)를 받았다. 임진왜란 후 해남 군민들이 해남읍에 오충사(五忠祠)를 세웠는데 충무공 이순신(忠武公 李舜臣), 충의공 이유길(忠毅公 李有吉), 의민공 이억기(毅愍公 李億祺), 증병조참의 이계년(贈兵曹參議 李桂年)과 함께 모셔져 있다. 순조 때에는 공주 군민들이 금호서원을 세워 배향해 오다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헐렸다. 그 후 1971년 공주유림과 진주류씨대종회의 주선으로 공주시 장기면에 충렬사를 세워 제향을 올리고 있으며 시문과 행장, 기, 전을 모아 엮은 「석담유고(石潭遺稿)」가 전해지고 있다. 公의 묘소는 고양시 행신동 세장지에 모셔져 있으며 묘역과 신도비는 1978년 경기도 기념물 제50호로 지정되었다. 신도비는 좌의정 문충공 월사 이정구(文忠公 月沙 李廷龜)가, 행적(行蹟)은 영의정 문정공 잠곡 김육(文貞公 潛谷 金堉)이 지어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에 편입됐다.

 

公은 군수 이구순(李久洵)의 따님이며 이조판서 이문형(李文馨)의 외손녀인 전주이씨(全州李氏)와 양천허씨(陽川許氏) 사이에서 충걸(忠傑), 효걸(孝傑), 신걸(信傑), 예걸(禮傑), 제걸(悌傑), 지걸(智傑), 의걸(義傑) 等 모두 7男 2女를 두었다. 효걸(孝傑)은 이괄의 난(李适의 亂)에 功을 세워 진양군(晉陽君)에 봉군(封君)되었고 지걸(智傑)은 심하전투(瀋河戰鬪)에서 순절(殉節)하여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추증(追贈)되었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 「광해군 일기」, 「효종실록」, 「석담유고」, 「난중일기」, 「해동명신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