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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겸재공 류종선(謙齋公 柳從善)

       (중종14년~선조11년, 1519~1578)        

 

 

公은 증호조참판 류유(贈戶曹參判 柳柔)와 장흥창수 임문재의 따님인 풍천임씨 사이의 3남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字는 택중(擇仲)이며 號는 겸재(謙齋)이다. 祖父는 증형조참의 병절교위 자공(秉節校尉 自恭), 曾祖는 증사복시정(司僕寺正) 충무위 부사정 계원(忠武衛 副司正 繼源), 高祖가 상호군공 분(笨)이다. 이조판서 문간공 염(文簡公 琰)이 5代祖이다. 소재공 순선(素齋公 順善)이 親兄이며 해주목사 승선(海州牧使 承善)이 한 살 아래의 從弟이다. 현량과(賢良科) 출신의 전적공 정(典籍公 貞)이 숙부가 된다. 公은 兄 소재공 및 사촌 형제들과 함께 숙부 貞으로부터 글을 배웠으며 “우리 집안을 빛낼 이는 순선과 종선 형제”라는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24살이던 중종 38년(1543)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명종 1년(1546) 증광시 문과에서 을과에 합격했다. 公은 승문원 부정자, 박사를 거쳐 사헌부 감찰을 역임한 뒤 양구 현감(縣監)으로 나갔다. 公이 부임한 양구는 벽지인데다 때마침 질병까지 돌아 관아(官衙)의 곳간이 비어 현감마저 점심을 거를 정도였지만 公은 백성을 구휼(救恤)하는데 전력을 쏟아 이들이 유맹(流氓)이 되는 것을 막았다. 명종 10년(1555) 성절사(聖節使)를 따라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를 다녀와서 이해 11월 사헌부 지평이 되어 행실이 바르지 못한 宰相의 아들을 국문(鞠問)하는 일이 발생했는데 동료들이 선처하려 하였으나 公은 법대로 처벌하고 아들의 문제로 재상이 피해를 보는 일이 없도록 조치하였다. 이후 종부시첨정(宗簿寺僉正) 겸 춘추관사로 승진하고 명종 12년(1557)에는 통례원 봉례(通禮院 奉禮)가 되어 순회세자(順懷世子)의 예절을 가르쳤다. 명종은 公의 지도를 아주 흡족하게 여겨 사재부정(司宰副正)으로 승진시켰다. 명종 14년(1559) 4월 지제교 겸 세자시강원 문학(世子侍講院 文學)에 임명되었다. 知製敎는 교서의 초안을 작성하는 일로 문장력을 인정받은 사람이 맡게 되는 자리이다. 명종 6년(1551) 지제교에 임명되어 당상관이 될 때까지 그 직책을 겸임하였던 兄 順善과 함께 문장력이 출중했음을 알 수 있다. 명종 15년(1560) 5월 사간원 사간(司諫)에 임명된 公은 홍문관 부응교, 응교 등을 거쳐 명종 16년 2월 사간원 사간에 재임명되었을 때 어전(御前)에 나아가 방자한 외척의 탐학(貪虐)을 치죄(治罪)할 것을 주청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公의 사촌동생인 승선도 사헌부 지평으로 있던 명종 14년(1559) 경연에서 왕실과 재상가(宰相家), 문정왕후를 배경으로 한 권력남용과 백성을 수탈하는 사례를 들어 권력핵심을 우회적으로 비판하였으며 승선, 종선 종형제들도 권력에 맞서 정론을 폈다. 이후 의정부 검상(議政府 檢詳)과 의정부 사인(議政府 舍人)을 거쳐 홍문관 典翰에, 명종 18년(1563) 6월 홍문관 직제학에 임명되었다. 왕은 이때까지 6년 동안 왕세자를 시강(侍講)하였는데 임금은 公을 자식의 스승으로 융숭하게 예우하였다.

 

명종 19년(1564) 1월 형조참의에 이어 동부승지, 우부승지, 좌부승지를 역임하며 임금을 측근에서 보필했다. 명종 21년(1566) 영흥부사로 나갔다가 돌아와 호조참의가 되었으며 선조 2년{(1569) 11월 하절사(賀節使)로 明에 다녀왔다. 선조 5년(1572) 여주목사, 선조 6년(1573)에 오위장(五衛將)을 겸하였다가 선조 7년(1574) 파주목사와 선조 8년(1575)에 부평부사를 역임했으며 선조 10년(1577)에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다음해인 선조 11년(1578) 4월 14일 향년 59세로 타계했다. 公은 목민관, 헌관, 간관으로서 또 스승으로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였으며 유교와 불교에 밝은 文臣이다. 어린 시절 곤궁했던 公이지만 청빈한 자세를 흩트리지 않았으며 타계하였을 때에는 장사도 지내지 못할 정도여서 부의금으로 앞서간 부인 묘에 합장하였다. 公과 소재공(素齋公), 목사공 승선((牧使公 承善)은 모두 문재(文才)가 뛰어나 홍문관(弘文館),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 등 3司의 요직을 거쳤고 다 같이 임금을 곁에서 보필하는 승지 직(承旨 職)을 역임했다.

 

配位는 별좌 김택(別坐 金澤)의 따님인 안동김씨이다. 슬하에 진사 석보(進士 錫輔)와 딸을 두었으며 사위는 진사 청주인 한중후(進士 淸州人 韓仲厚)이다. 묘지는 양주군 술당리 미좌(未坐)에 부인과 합장으로 모셔졌다가 광주 돌마면 율리 막은동(현재의 경기도 성남시 율동) 子坐로 천묘하였다.

 

참고문헌 :「명종실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