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없음

 

   소재공 류순선(素齋公 柳順善)

       (중종11년~선조8년, 1516~1575)        

 

 

公은 중종 11년(1516) 9월 20일 증호조판서 류유(柳柔)와 광흥창수 임문재(廣興倉守 任文載)의 따님인 풍천임씨의 3男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字는 순중(純仲), 號는 소재(素齋)이다. 조부는 형조참의 병절교위 자공(秉節校尉 自恭), 증조가 사복시정 충무위 부사정 계원(忠武尉 副司正 繼源), 高祖가 상호군공 분(上護軍公 苯)이다. 이조판서 문간공 염(文簡公 琰)의 5대손이며 호조참의 겸재공 종선(謙齋公 從善)이 동생이며 해주목사(海州牧使)를 지낸 목사공 승선(牧使公 承善)이 종제(從弟)가 된다. 母親의 祖父는 연산조의 권신(權臣)인 임사홍이다. 따라서 世宗朝에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에 앞서 신동(神童)으로 불리면서 문명을 떨쳤던 사우당 임원준의 증손녀이다. 公은 출중한 외가의 문재(文才)를 이어 받았다. 公은 서른 살이 되던 명종 1년(1546)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어 태학(太學: 성균관)에 들어가 명종 2년 (1547) 윤 9월25일 임금이 태학에 행차하여 치룬 알성시(謁聖試)에 을과(乙科)에 합격하여 승문원 권지(權知: 임용대기 견습 관원)가 되어 명종 4년(1549)에 사관(史官) 혹은 한림(翰林)으로도 불리는 예문관 검열로 출사(出仕)하였으며 매일 매일의 시정기(時政記)를 기록하는 춘추관 기사관과 승문원 주서(注書)를 거쳐 홍문관 정자에 임명되었다.

 

명종 5년(1550) 홍문관 저작 겸 경연설경(弘文館 著作 兼 經筵說經)이 되어 중종실록(中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명종 6년(1551) 성균관 박사, 홍문관 부수찬, 병조좌랑을 거쳐 교서의 초안을 작성하는 지제교가 되었다. 公은 이후 당상관에 오를 때까지 다른 벼슬을 하더라도 항상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할 정도로 문장력을 인정받았다. 명종 7년(1552)에 북쪽 변방을 우려하여 감군어사(監軍御史)를 설치하였을 때 그 직책에 선발되었으며 명종 8년(1553)에는 홍문관 부교리, 사간원 헌납을 거쳐 서장관으로 중국을 다녀왔다. 명종 9년{1555} 병조정랑을 역임했고 명종 10년(1556) 9월에는 사가독서(賜暇讀書)에 피선(被選)되어 독서당에 들어갔다. 사가독서란 유능한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도록 한 제도로서 세종 8년(1426)에 처음 실시된 이래 영조 49년(1773)까지 총 48차에 결쳐 모두 320명만이 사가독서의 혜택을 누렸을 뿐이다. 公은 3개월간의 사가독서를 마친 뒤인 11월에 병조정랑에 임명되었다. 명종 11년(1556) 홍문관 수찬으로 문과 중시에 병과에 합격하였는데 중시(重試)는 과거에 급제한 당하관(堂下官) 이하의 문무관(文武官)에게 다시 보게 하는 시험으로 10년에 1번씩 실시하였으며 합격한 자는 최고 正3品까지 품계를 올려주었다. 명종 12년(1557)에 종묘첨정(宗廟僉正), 명종 13년(1558)에는 명의 사신을 맞는 원접사(遠接使)로 활동한 뒤 홍문관 부교리, 사헌부 장령, 지평을 거쳐 홍문관 교리에 임명되었으며 명종 14년(1559)에는 홍문관 부응교를 거쳐 응교(應敎)가 되었고 명종 15년(1560)에는 홍문관 전한(典翰)과 사인(舍人)을, 명종 16년(1561)에는 홍문관 직제학을 명종 17년(1562)에는 형조참의를 거쳐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었다.

 

명종 18년(1563)에 승정원에 들어와 동부승지, 우부승지, 좌부승지를 역임하였다. 公이 병조참지를 지낼 때 실록의 사관(史官)은 ‘公의 성품이 온후하고 문재(文才)가 있다’라고 評하였다. 명종 19년(1564)에 우승지, 명종 20년(1565)에는 좌승지를, 명종 21년(1566) 형조참의를 거쳐 첫 외직(外職)인 강원도 관찰사(강원감사)에 임명되었는데 출사 이후 15년 동안 매년 승진하는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첫 외직인 강원관찰사로 부임한지 반년이 못가 병을 얻어 돌아와야 했으며 선조 6년에 장예원(掌隸院) 판결사에 임명되었으나 2년 뒤인 선조 8년(1575) 5월 28일 향년 60세로 타계하였다. 공은 죽어서야 책 읽는 것을 끝낸 독서인이다. 公은 임종(臨終)을 앞두고 통감강목 한질을 뽑아오게 하여 소리 내어 두어 장을 읽고 눈을 감았다고 김귀영(金貴榮)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에 적고 있다. 후손들이 公의 유고(遺稿)를 모아 「소재유고(素齋遺稿)」를 펴냈다. 소재유고 서문(序文)은 正祖로부터 ‘당대 제1 문장’이라 칭송받은 예문관 제학 해좌 정범조(海左 丁範祖)가 발문(跋文)은 정조의 독상(獨相)을 받은 번암 채제공(蔡濟恭)이 썼다. 配位는 종실인 공산령 이정(公山令 李挺)의 따님인 전주이씨이다. 전주이씨와의 사이에 석필(錫弼), 석현(錫賢), 석준(錫俊), 석영(錫英) 등 네 아들과 딸 둘을 두었으며 아들 석민(錫民)을 두었다. 석필(錫弼)과 석현(錫賢)은 금부도사를 역임하였다. 두 딸은 좌랑 진천인 송주빈, 현감 함평인 이성원에게 출가했다.

 

公의 묘소는 경기고 여주군 북내면 오학리 정퇴에 모셔져 있다.

 

참고문헌 :「중종실록」,「명종실록」,「진주류씨문집」,「묘지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