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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민공 류진동(貞敏公 柳辰仝)

       (연산군3년~명종16년, 1497~1561)        

 

 

公은 연산군 3년(1497) 2월 경신일(庚申日)에 증좌참찬공 진사 류한평(進士 柳漢平)과 수사 홍귀해(水使 洪貴海)의 따님인 남양홍씨의 2남 2녀 중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字는 숙춘(叔春), 號는 죽당(竹堂), 시호(諡號)는 정민(貞敏)이다. 조부가 사예공 자문(司藝公 子文), 증조가 북부령 열(北部令公 悅), 고조가 청백리공 겸(淸白吏公 謙)이다. 公은 중종 17년(1522) 2월 26세에 사마시 양과(司馬試 兩科: 生員, 進士科)에 합격하고 35세이던 중종 26년(1531) 10월9일에 식년시(式年試) 대과에 병과 합격 등과(登科)는 늦었으나 국가 주요문서를 작성하는 승문원 정자(正字), 예문관 교열(校閱), 승정원 주서(注書) 등을 거쳐 중종 32년(1537)부터 중용되기 시작했다. 사헌부(司憲府)에서 감찰, 지평, 장령, 집의를 역임했으며 시강원 사서(侍講院 司書), 병조 좌랑, 사간원 정언(司諫院 正言)을 거쳐 홍문관에서 교리, 응교, 전한을 거쳐 직제학에 올랐다. 직제학에 임명된 해는 중종 36년(1541)으로 마흔 다섯 살이었다. 사헌부 감찰에서 홍문관 직제학까지 불과 4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공은 홍문관 응교로 있던 중종 36년(1541) 부제학 이언적, 직제학 이준경, 교리 권철, 이황 등과 함께 ‘일강구목소(一綱九目疏)’라는 상소(上疏)를 올린다. 이는 중종이 거듭된 천재지변과 민생악화에 따른 흉흉한 민심을 바로잡기 위한 폐정 개혁안을 대신들에게서 구한데 따른 것이다. 이 상소는 임금이 유념해야할 10가지를 1개의 綱과 9개의 目으로 정리하였다. 중화를 행동지침으로 삼아 궁금(宮禁: 친인척과 측근을 경계하라는 의미)을 엄(嚴)히 하고 기강을 확립하며 인재를 널리 발굴하라는 등의 건의를 했다. 公은 중종 38년(1543) 홍문관 부제학으로 부임하자마자 조광조의 주도로 추진되던 도학정치가 실패로 끝난 중종 14년(1519)의 기묘사화(己卯士禍) 후유증으로 도의정치 구현과 인륜도덕 앙양의 기본서(基本書) 역할을 해 오던 소학(小學)의 장려를 촉구하는 상소를 올린다. 이황은 이 상소문을 보고 암흑의 시기를 벗어나는 한줄기 햇빛과 같은 상소문이라 하여 ‘일양소(一陽疏)’ 라고 극찬했고 중종은 소학을 권장토록 지시를 내렸다.

 

명종 10년(1555) 5월 왜선(倭船) 70여 척이 전라도 영암군 달량포(達梁浦)에 쳐들어와 살인, 방화, 약탈을 감행한 이른바 을묘왜변(乙卯倭變)이 일어났는데 한성좌윤이었던 公을 중추부의 책임자로 삼아 왜변을 진압하였으며 함경도 관찰사를 마친 뒤 돌아와 공조판서가 되었으나 명종 1년(1545)에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 외척인 윤원형 일파의 횡포가 극에 달하자 명종 14년(1559) 여름 이를 비판하고 바로잡아 줄 것을 요구하는 강력한 상소를 올렸던 것이 화(禍)가 되어 탄핵을 받아 한 달 동안 투옥된 후 평안도 정주에 유배되었고 다음해 귀양에서 풀려나 은거생활 끝에 명종 16년(1561) 3월 1일 향년 65세로 세상을 떠났다. 公은 정치가 보다 학자, 예술가로서의 명성이 더 높았다. 주역(周易)을 비롯한 고금경서에 밝은 대학자였으며 대의에 충실한 문장가로서 글씨 또한 당대의 명필로써 특히 큰 글씨를 잘 썼다. 명종 12년(1557) 함경도 관찰사로 있을 때 경성(鏡城) 북병영에 있는 제승당(制勝堂)의 현판 글씨를 썼으며 현재 안평대군의 글씨로 알려진 남대문의 ‘숭례문(崇禮門)’이 公의 글씨라는 설도 있다. 문인화(文人畵)에도 能하여 특히 대나무를 잘 그려 죽당(竹堂)이라는 아호도 여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퇴계 이황이 ‘죽당 류숙춘 진동학사 묵죽(竹堂 柳叔春 辰仝學士 墨竹)‘이라고 題한 詩가 퇴계집에 전해오고 있다. 공은 문무겸전한 정치가에다 학자였으며 예술가로서도 일가를 이룬 공은 동양적 기준으로도 어느 한곳 치우침이 없는 ‘君子’였으며 서양적 기준으로도 팔방미인의 ‘르네상스인’ 이라고 할 수 있다. “성품이 구속받는 것을 싫어하였고 글씨를 잘 쓰고 그림을 잘 그렸다”는 실록의 졸기는 公의 품격과 재능을 응축하여 표현하고 있다. 公은 ‘충효로서 가문을 이어가고 청백한 정신과 행동으로 업적을 남긴다. 충효전가 청백유업(忠孝傳家  淸白遺業)’ 이라는 여덟 글자를 써 자손에게 전하였다. 配位는 두 분으로 별제 김흥문(別提 金興門)의 따님인 안동김씨로 3남 1녀를 두었고 後配位는 판결사 윤형(判決事 尹衡)의 따님인 남원윤씨(南原尹氏)로 딸 하나를 두었다. 첫째 아들 도(濤)는 승지(承旨)를 둘째 아들 용(溶)은 경원부사를 막내아들 淮는 청하현감을, 큰 사위 해주인 정척(鄭惕)은 승지(承旨)와 상주목사(尙州牧使)를 지냈다. 후손 가운데 문과와 무과, 음사(蔭仕)로서 조정에 선 이가 무려 백 수십 명에 이르러 정조(正祖)께서 자손이 현달함에 정민(貞敏)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公의 묘소는 고양시 행신동 선영에 모셔져 있으며 홍섬(洪暹)이 지은 신도비는 고양시 향토유적 제28호로 지정되어 있다.

 

참고문헌 :「중종실록」,「명종실록」,「이황 퇴계집 별집 권1」,「박미 분서집 권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