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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성공 류순정(文成公 柳順汀)

       (세조5년~중종7년, 1459~1512)        

 

 

公은 세조 5년(1459)에 증영의정 상의원정 류양(贈領議政 尙衣院正公 柳壤)과 집현전 부수찬 정즙(鄭楫)의 따님인 청주정씨(淸州鄭氏)의 4남4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지옹(智翁)이다. 祖父가 증좌찬성 동부지돈녕부사 진산군 자해(晉川君 子偕), 증조가 이조판서 이판공 이(吏判公 怡), 高祖가 보문각직제학 청백리공 겸(淸白吏公 謙), 5대조(五代祖)가 예문춘추관대제학 정평공 구(靖平公 玽)이다.

 

公은 중종반정(中宗反正)의 세 주역으로 박원종, 성희안과 함께 연산군 혼정(燕山君 昏政)의 내우(內憂)와 북로남왜(北虜南倭)의 외환(外患)을 종식시키고 위기의 국란으로부터 사직(社稷)을 구해낸 3공신(三功臣)으로서 삼정승(三政丞)을 역임하며 나라를 바로 세웠고 삼포왜란(三浦倭亂) 등 외척(外賊)을 물리쳐 나라를 지킨 문무겸전(文武兼全)의 역사적 업적을 남기신 인물이다.

 

公은 성종 11년(1480) 22세에 兄 첨정과 함께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진사(進士)가 되었고 성종 18년(1487) 별시(別試) 알성문과 갑과에 장원으로 합격,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출사(出仕)하여 함경도 평사 시절 야인들의 침범을 막지 못한데 연루되어 의주로 유배되기도 하였으나 전라도에서 해적들이 출몰하자 公을 전라도 수적추포경차관(全羅道水賊追捕敬差官)에 임명하여 사태를 수습하자 그 공로로 홍문관 수찬으로 승진하였다. 公은 연산군 즉위 후 사간원 헌납에 임명되어 연산군 혼정을 이끈 임사홍의 간악함의 논박과 평안도 병마절도사 전림(田霖)의 권력 남용을 추궁하는 진언을 하였으며 북방 관서지방이 소란스러워지자 公은 평안도 경차관으로 출정하였다. 公은 연산군의 신임이 두터워 공조참판 시절에는 하정사(賀正使)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 온 뒤 평안도 관찰사, 지중추부사와 이조판서에 임명되고 오위도총관을 겸임하였으나 연산군의 혼정이 계속되자 박원종, 성희안과 함께 중종반정(中宗反正, 1506)을 일으켜 조선조 11대 중종을 즉위케 하였다. 公은 反正이 성공한 뒤 정국공신 1등(靖國功臣 一等)에 녹훈되어 청천부원군(菁川府院君)에 봉(封)해졌으며 숭정대부가 되었고 곧이어 대광보국숭록대부 우의정 겸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중종 2년(1507) 견성군을 추대하여 일으킨 역모를 사전 진압하여 정난공신 1등(定難功臣 一等)에 거듭 책록 되었다.

 

조선은 개국 이래 국방문제를 감안, 왜인들을 통제하기 위하여 태종 7년(1407)에 부산포와 제포, 세종 8년(1426)에 염포 등 삼포(三浦)를 개항하고 왜관(倭館)을 설치하여 교역과 접대의 장소로 삼았다. 중종 5년(1510) 4월 제포에서 약5,000여명의 난도(亂徒)들이 부산포와 제포를 공격하여 한 때 이를 점령하는 변란이 일어났는데 좌의정인 公이 도체찰사로 군(軍)을 지휘하였으며 다시 도원수가 되어 현지에 직접 출동하여 왜란을 진압하고 재발을 막기 위한 방책을 각 포(浦)마다 실시하게 한 뒤 돌아왔다. 이는 삼포에서 일어난 일본 거류민들의 대폭동 사건으로서 삼포왜란(三浦倭亂=庚午倭變)이라 하는데 公이 말년에 이룩한 큰 업적으로 남은 것이 바로 삼포왜란의 진압이다. 중종의 公에 대한 신임이 각별하여 재산문제로 대간의 탄핵을 받았으나 삼포왜란의 군공(軍功)으로 중종 7년(1512) 10월에 영의정에 임명되었지만 2개월 뒤 12월 20일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54세였다.

 

公을 생전에 각별히 신임하였던 중종은 부평도호부 수탄면(지금의 구로구 오류동, 온수동 부천시 작동 등)일대를 묘역으로 하사하였다. 公에게 처음 내려진 시호(諡號)는 무안(武安)이었으나 문정(文定)으로 바뀌었고 명종 때에 다시 문성(文成)으로 고쳐졌으며 중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명종(明宗)의 모후인 문정왕후의 시호를 피하기 위해 왕명에 따라 문정에서 문성으로 개시(改諡)되었다.

 

배위는 별좌 권효충(別坐 權孝忠)의 따님인 안동권씨이며 훈련도감(訓練都正)과 오위도총부총관(五衛都摠副摠管)을 지낸 진산군 홍(晉山君 泓)과 황간 현감(黃澗 縣監)을 지낸 자(滋)를 아들로 두었다. 公의 묘소는 서울 구로구 오류동 종산 자좌(子坐)에 정경부인 안동권씨와 상하분(上下墳)으로 모셔져 있으며 아들 진산군 홍(晉山君 泓)의 묘소도 곁에 모셔져 있는데 묘역의 석물 일체(石物 一切)는 서울지역에서는 유일하게 현존하는 부자공신 묘역(父子功臣 墓域)으로서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22호로 지정되었으며 신도비명은 좌찬성 진천군 강혼(姜渾)이 지었고 중종의 사위인 여성위 이암 송인(1517~1584)이 글씨를 썼다. 또한 公의 영정(影幀)은 족자 형태로 중종 원년에 왕명에 의해 그린 입각도형(入閣圖形)으로 크기는 안쪽이 1.72m×1.10m이고 바깥쪽은 2.34m×1.21m로서 진산군 영정과 함께 지방문화재로 신청하였는데 서울시 문화재심의위원회는 문화재적 가치로 보아 문화재청에 국가문화재로 심의를 의뢰하여 심의중이다.

 

참고문헌 :「성종실록」,「연산군 일기」,「중종실록」,「국조방목」,「해동명신록」,「국조인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