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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사헌공 류세침(大司憲公 柳世琛)

       (세종28년~중종6년, 1446~1511)        

 

 

公은 세종 28년(1446) 4월 19일 증 이조참판 별제 류종윤((別提 柳宗潤)과 이조참판 상호군 민해(上護軍 閔解)의 따님인 여흥민씨(驪興閔氏)의 1남 1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字는 자헌(子獻)이다. 조부는 상호군 해(上護軍 諧), 曾祖는 현감공 진(縣監公 瑱), 高祖가 안간공 혜손(安簡公 惠孫)이다. 公은 성종 17년(1486) 40세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4년 뒤인 성종 21년(1490) 11월 9일  44세의 나이로 별시 문과 병과(別試 文科 丙科)에 합격하였다. 公은 불혹의 나이를 지나 뒤늦게 조정에 출사(出仕)하여 주로 언관직(言官職)에 있으면서 파사현정(破邪顯正)의 정론을 폄으로써 국정을 바로 잡는데 큰 업적을 남겼다. 실록에 따르면 연산군 1년(1495) 12월에 사간원 정언(正言), 연산군 5년(1499)에 사헌부 지평(持平), 연산군 7년(1501) 8월에 사헌부 장령(掌令), 연산군 10년(1504) 9월 18일 의금부에 구금된 뒤 파직과 함께 전라도 해남에 유배되었다.

 

중종반정(中宗反正: 연산군12년, 1506년9월)으로 유배에서 풀려나 중종 3년(1508) 11월에 대사간에 다시 복직되어 중종 4년(1509) 8월 예방승지(禮房承旨), 중종 5년(1510) 2월에 장례원 판결사((掌隷院 判決事), 동년 8월에 사헌부(大司憲)에 이어 동년 11월에 형조참판을 잇달아 역임하였으나 다음해 중종 6년(1511) 1월 21일에 충청도 관찰사로 나가 관내를 순시하던 중 3월 14일 청주에서 순직하니 향년 66세였다.

 

公은 줄곧 사간원과 사헌부의 요직을 역임하였으며 대사간과 대사헌으로 그 수장에 오르기까지 했다.사간원(司諫院)과 사헌부(司憲府)는 홍문관(弘文館)과 함께 삼사(三司)로 불리어지는 매우 중요한 국가기관이다. 사간원은 간쟁과 논박을 맡아 주로 임금에게 간언하는 직책이며 사헌부는 정사를 논하고 백관을 감찰하여 기강을 진작하며 풍습을 교정하여 억울한 일을 바로 잡는 국가기관이다. 때문에 三司의 관원은 학식과 신망이 두터운 사람으로 임명하는 것이 통례였다. 公은 무오갑자사화(戊午甲子士禍)를 비롯한 유례없는 연산군의 폭정기간 중 요직(暴政期間 中 要職)을 지내면서 혹은 상소를 통하여 혹은 경연(經筵)자리에서 두려움 없이 인사의 불공정과 궁중의 비리, 왜구에 대한 대비 등 각 분야의 잘못을 직간(直諫)하였다. 이러한 거침없는 직언들이 연산군의 역린을 건드려 파직(罷職)과 함께 유배를 당하게 했던 것이다. 公은 반정세력(反正勢力)의 폐정(弊政)을 바로 잡기 위해 중종 5년(1510) 5월 20일에 올린 「십조소(十條疎)」에서는 치국(治國)의 방도로 [1]심술(心術: 공연히 심술을 부리는 마음)을 바르게 할 것 [2]간쟁(諫諍)을 받아드릴 것 [3]명기(名器: 큰 인물)를 아낄 것 [4]小人을 멀리 할 것 [5]장오(뇌물을 받는 탐관오리)를 멀리 할 것 [6]포상(褒賞)을 중하게 할 것 [7]형벌과 죄를 신중히 할 것 [8]부비(浮費: 낭비)를 생략할 것 [9]민은(民隱: 백성의 괴로움)을 구휼할 것 [10]변장(병사, 수사, 첨사)을 잘 선택할 것 등을 강조하였다. 공이 제시한 이러한 치국 원칙은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적용되어 언관(言官)으로서의 빛나는 자취를 남겼다.

 

배위는 첨지중추부사 유기창(僉知中樞府事 兪起昌)의 따님인 기계유씨(杞溪兪氏)로 현모양처(賢母良妻)의 전형이었다. 公이 충청감사로 청주지방을 순시하던 중 순직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公이 타계한지 나흘 후인 3월 18일 목욕재계한 후 소복(素服)으로 갈아입고 정루(亭樓)에서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조정에서는 열부(烈婦)로 포창하여 정려(旌閭)를 내리고 정조조에 이르러 이 사실을 삼강록(三綱錄)에 실었다. 10세 연하의 처남 유여림(兪汝霖, 1476~1538)은 中宗朝에 대사헌, 형조판서, 예조판서를 지냈다. 公은 기계유씨 사이에서 3남2녀를 두었는데 첫째 아들 홍경(弘慶)은 상서원 부직장(尙瑞院 副直長)을 지내고 좌통례(左通禮)에 추증되었다. 둘째 아들 상경(祥慶)은 進士를 지내고 셋째 아들 충경(忠慶)은 사역원 직장(司譯院 直長)을 지냈다. 한편 첫째 딸은 고성인 이붕(李鵬0에게, 둘째 딸은 영의정 김전(領議政 金詮)의 아들인 참봉 연안인 김안우(金安遇)에게 출가했다. 후손들 가운데에는 예조참의를 지낸 思規,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希規, 병조참판을 지낸 순익(舜翼)은 모두 大科 출신으로 집안을 빛냈다. 묘소는 시흥 서면 기성리 해좌(始興 西面 己省里 亥坐)에 합장되었다가 1970년 4월 도시계획으로 개발됨에 따라 양주군 진건면 사능리 문제산 유좌(楊州郡 眞乾面 思陵里 文帝山 酉坐)에 천장(遷葬)하였다. 公의 9세손(九世孫) 종묘서령 응상(應祥)의 요청으로 대사간 유최기(兪最基: 후에 영의정 역임)가 묘비명(墓碑銘)을 지었다.

 

참고문헌 :「연산군 일기」,「중종실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