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없음

 

   청백리공 류겸(淸白吏公 柳謙)

       (? ~ 태종11년, ? ~ 1411)        

 

 

公은 정평공 류구(靖平公 柳玽)와 이씨(李氏) 사이에 독자로 태어났다. 몰년(沒年)은 기록에 나와 있으나 태어난 해는 기록이 없다. 公은 고려 우왕 6년(1380)에 문과에 합격하였는데 당시 부친 정평공의 나이가 45세이었고 또 급제(及第)한 바로 다음 해에 출사(出仕)한 것으로 보아 급제 당시 관례(冠禮)를 올린 나이(20세)를 지났을 것으로 보이므로 1350년대 후반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公은 우왕 7년(1381) 문하부 주서(종7품)로 출사하여 이후 성균관 전적(典籍: 正6品)에 올랐다. 公에 대한 공식 기록이 다시 등장하는 것은 조선조 3대(三代) 태종(太宗) 7年(1407)에 광주목사(廣州牧使)에 임명되었는데 조선조(朝鮮朝)가 출범한지 15년째가 되는 해이며 公의 부친 정평공이 별세한지 9년이 지난 해였다. 기록상으로 公이 조선조에 봉직한 기간은 1407년부터 별세할 때인 1411년까지 불과 4년일 뿐이지만 이 기간 중 公의 벼슬은 예문관 직제학(藝文館 直提學)까지 올랐으며 주목할 만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公은 광주목사로 임명된 바로 다음해인 태종 8년(1408) 내직인 우사간의대부(右司諫議大夫)에 임명되었고 우사간의대부가 된지 불과 며칠이 지나지 않았던 그해 12월 말 조대임 사건(趙大臨 事件)이 터지는데 이때에 훗날 황희정승과 함께 명재상(名宰相)으로 활약한 맹사성(孟思誠)의 목숨을 구했다. 조대림은 개국공신 조준의 아들이자 태종(太宗)의 부마(駙馬)였다. 그는 궁중 소속 군사를 왕의 윤허 없이 사적(私的)으로 사용하여 말썽이 되자 사헌부에서는 조대림을 불러 문초하면서 笞刑을 가하였는데 이는 태종의 역린을 건드린 사건으로 왕실을 업신여긴 행동이라 격노하여 사헌부 대사헌을 공개처형할 것을 命하자 公이 부당함을 직언하여 맹사성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公은 경기우도(京畿左右道) 관리 30여명과 연명 상소(連名 上訴)로 류정현 경기감사의 임용 철회를 건의하는 상소로 광주목사 직첩을 거두고 진주로 귀양을 보냈으나 2개월 뒤 사면하였다. 태종 9년(1409) 공은 좌사간의대부로 임명되었는데 당시 우사간의대부로 임명된 목은 이색의 셋째 아들이자 公의 부친 정평공과 이종(姨從)간인 이종선(李種善)이었다. 태종은 개국공신과 자신을 왕위에 오르게 한 공신들을 견제하기 위해 고려조 유신들을 등용 사헌부, 사간원의 요직을 맡겼던 것으로 짐작된다. 公은 윗사람뿐만이 아니라 아래에 대해서도 엄격하였다. 태종 10년(1410) 3월에는 형조참의(刑曹參議)로 있으면서 명나라에 말을 바치는 진마사로 다녀올 때에 말을 데리고 가는 압송관들이 도중에 말을 바꿔치는 비리를 발견하자 이들을 가차 없이 처벌하였다. 公은 태종 11年(1411) 보문각 직제학(寶文閣 直提學)에 임명되었으나 그해 3월 별세하였다. 公은 시와 문장에 능하였으며 양봉, 축산 등의 이용후생에 필요한 여러 권의 저술을 남겼으나 公이 오랜 은거생활을 할 때에 저술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안타깝게도 모두 전하여지지 않는다. 다만 「동국여지승람」 경남 고성군편에 다음과 같은 詩 한 句節이 전해질 뿐이다.

부서진 옥그릇에는 붕어만 그득하고       折玉偏多鯽[절옥편다즉]

놀리는 수저에는 기장만이 있을 뿐이다.   流匙亦有粱[유시역유량]

이 詩句는 공이 문재(文才)의 편린(片鱗)과 함께 안빈낙도(安貧樂道)하는 자세를 엿볼 수 있다. 세종조에 이르러 公은 청백리에 녹선 됨으로 태조조 청백리에 녹선된 부친 정평공(靖平公)과 함께 父子 2代에 걸쳐 淸白吏에 녹선 되는 영광을 안았고 당숙(堂叔)인 문간공 염(文簡公 琰) 또한 세종조 청백리이니 이처럼 한 집안에 당대(當代)에 청백리가 3명이 나온 것은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다.

 

公의 배위는 참찬 최염(參贊 崔濂)의 따님인 충주최씨(忠州崔氏)로 철성부원군 이림(鐵城府院君 李琳)의 外孫女이다. 문간공(文簡公)이 이림의 사위이니 公은 당숙모의 친정 조카와 결혼한 것이다. 최씨부인과의 사이에서 4남2녀를 두었다. 첫째 아들은 이조판서 사수녹사 이(怡), 둘째 아들은 증 좌승지 북부령 열(悅), 셋째 아들은 봉상시윤 척(惕), 넷째 아들은 판사 전(恮)이다. 첫째 딸은 좌상 이귀령(李貴齡)의 아들인 연안인 이돈(李敦)에게, 둘째 딸은 우참찬 성주인 이견기(李堅基)에게, 셋째 딸은 신극례의 아들인 판관 영산인 신맹화(辛孟和)에게 출가했다.

 

公은 고양 화전에 모셔졌었으나 천장(遷葬)하여 부친 정평공과 함께 고양시 행신동 세장지(世葬地)에 안장되었다.

 

참고문헌 :「고려사」,「태종실록」,「동국여지승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