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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국선열 백초공 류완무(殉國先烈 白樵公 柳完茂)

                   (철종12년~순종1년, 1861~1907)        

 

 

公은 철종12년(辛酉, 1861)에 류보형(柳輔衡)과 민설훈(閔說勳)의 따님인 여흥민씨의 1남 3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중일(仲日), 호는 백초(白樵), 아명(兒名)은 완무(完茂), 초휘(初諱)는 인무(寅茂, 仁茂)이며 독립운동으로 인하여 안무(安茂), 완무(完懋)의 다른 이름을 사용하였다. 公은 대한제국 말에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구심하는 근국운동에 앞장서 헌신하였으나 불운하여 「백범일지」에만 나올 뿐이다. 조부는 화동(華東), 증조는 지학(之翯), 고조는 정유(正裕)로서 이판공 이(吏判公 怡)의 19代孫이며 시시내 후손이다.

 

公은 1896년 3월 8일 백범 김구 나이 21세에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에서 국모 민비시해사건에 대한 복수로 일본군 중위 쓰치다(土田讓亮)를 살해하여 해주옥에 투옥되었다가 인천감리서의 감옥으로 이감되었을 당시 용감한 청년동지 13명과 함께 감옥을 폭파하고 구출하려 계획을 세웠으나 사형 날짜가 잡히자 백범은 거사일 사흘 전인 1898년 3월 21일 새벽 탈옥하면서부터 인연을 맺게 된다. 公은 그의 동지들과 비밀결사대를 조직하여 탈옥한 백범을 민중 지향적 독립운동가로 육성하려 했으며 백범과는 公이 15살이 더 많았으나 평생 친구로 여겼다고 한다. 백범의 초명(初名)인 김창수(金昌洙)를 김구(金九, 金龜)로 개명해 주어 호는 연하(蓮下), 자는 연상(蓮上)으로 바꾸어 주었다고 백범은 술회하고 있다.

 

公은 1905년 전후로 전국을 순회하며 민족운동 동지들을 규합하고 처가인 전라북도 무주를 중심으로 민족운동 자금을 모금하였고 동지들의 은신처로 활용하기도 했다. 公은 45세 때인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 후 전가족을 데리고 북간도(北間島)지방으로 망명해 국권운동에 참여, 북간도 근거지개척과 관련하여 1881년부터 청이 간도지역의 개척에 착수하면서 간도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철거를 요청한데서 발생한 간도영유권 문제인 간도감계문제를 두만강 이북에서 토문강 이남에 걸쳐 영유권 다툼이 있는 지역의 역사, 지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간도가 우리 민족 고유의 영토임을 존중하기 위해 쓴 책 「북여요선(北輿要選)」의 서문에서 “우리 한국의 산천은 모두 백두산을 조종(祖宗)으로 삼았고 … 북간도의 간동(幹東), 해관(奚關), 남경(南京) 세 곳은 실로 우리 성조(聖祖)의 발상지(發祥地)였다. 간도(艮島)는 곧 우리에게 기첨[岐山・添水]과 풍패[豊邑・沛地]의 지방인데 멀리 떨어진 변방으로 보아서야 되겠는가. 강희(康熙帝)년간에 경계를 정할 때에 진실로 토문 이남은 우리의 국토에 속하게 했은즉 이제 어찌 공법(公法)을 업신여기고 선대의 법을 어기면서 우리의 강토를 침범하고 엿보는가!”라고 강력히 규탄하였다. 「북여요선」의 서문에 밝힌 간도의 영유권을 확정하려는 公의 강렬한 민족의식과 국토의식을 위암 장지연에게 보낸 간찰이 “위암장지연서간집”에 수록되어 있다. 公은 또한 이회영, 이상설, 여준, 이동녕, 장유순 등과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하는 만주의 독립운동기지 설치계획에 따라 용정촌(龍井村)에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는데 참여하였고 러시아 한인사회에서 최초의 한글신문으로 1908년 2월 창간된 “해조신문”의 발행과 국민교육기관인 계몽학교의 육성을 통한 장기적인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애국계몽단체인 서북학회, 샌프란시스코의 공립협회, 대한인국민회, 등 국내외의 민족운동 세력과 연계해 장기적인 항일투쟁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북간도와 연해주에 걸친 민족운동과 북간도 개척이민의 역사의 일익을 담당했던 公은 간도 민족운동 세력의 분열로 1909년 2월 비운의 죽음을 맞게 된다. 1909년 2월 24일 저녁이 다 될 무렵 公이 말을 타고 신풍까지 가는 길에 괴한 4~5명에 의해 홍기하 골짜기방면으로 유괴되어 끌려가 암살되었으며 간도관리사인 이범윤이 포살하라는 문적을 내렸고 명령을 받은 4명이 그를 끌고 가서 죽인 것이라는 사실을 훈춘경무국의 “경무국비밀조사안”에서 밝혀졌다. 같은 민족인 이범윤 계열의 “의병파” 손에 의하여 암살된 것이다. 암살의 전말을 보도한 [권업신문]에 의하면 1913년 11월 20일 훈춘 신풍학교의 학생 일동이 류완무가 암살된 곳인 훈춘 홍치허를 찾아 조례를 표하고 통곡한 뒤에 그곳에 류완무의 행적을 기려 정동학교를 세우고 김창훈, 이정휘, 채동삼 등 3인의 교사와 45인의 학생, 일백삼십여원의 경비를 모아 개학했다고 전하고 있다. 또한 암살된 공의 시신은 오재영, 이윤복, 이종갑 등이 시체를 수습하여 매장하였다고 무주지역 향토사료인 [적성지]에 기록하고 있다.

 

해방 후 1951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1900년 이후 순국선열로 기리는 공훈작업에 착수하였는데 134명의 순국선열에 추증되었으며 2009년 정부는 ‘항일독립운동가’ 류완무의 공훈(功勳)을 기려 “건국훈장애족장”을 추서하였지만 직계가족이 국내에 없어 현재 국가보훈처에서 보관하고 있어 公의 후손 찾기와 公의 업적 재조명, 독립유공자묘역 안장 등을 후대가 우선해야 할 일이며 이것이 公의 항일정신을 역사에 바로 세우는 것이다.

 

참고문헌: 「백범일지」, 「백초 류완무의 생애와 민족운동, 이희환 著,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刊, 인천학연구 2009.10월호 p.261~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