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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판공 류경(參判公 柳畊)

       (영조 32년~순조19년. (1756~1819)        

 

공은 영조 32년(1756) 1월 17일 증 호조참판 진원군 류사철(晋原君 柳師喆)과 지중추 한협(知中樞 韓浹)의 따님인 청주 한씨(淸州韓氏)간에 2남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경수(耕叟). 호는 연자(然子)이다. 공의 부친 진원군 사철의 생부는 종묘서령 응상(應祥)이며 양부는 증 좌승지 응서(應瑞)이다. 응서는 “병자보"의 세 번째 서문을 쓴 분이다. 증조는 증 사복시정 정휘(司僕寺正 正徽), 고조는 충훈도사 광정(忠勳都事 光廷)이다. 공은 29세가 되던 정조 8년(1784) 문과 전시에서 을과 2위(총26명 중 5위)로 합격했다. 다음해인 정조 9년(1785) 5월 3일 57명의 지제교(知製敎)의 한 사람으로 선발되었다. 정조 11년(1787) 1월 26일 강제문신(講製文臣)에 선발되었다. 정조는 정기적으로 당하관의 문신들을 대상으로 의정부 주관 아래 경사(經史) 강독및 시문(詩文)제술을 겨루게하는 강독제술(講讀製述) 시험에서 공이 5명중 수석을 차지한 것이다. 현재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1책 6장의 “강제문신제명록(講製文臣題名錄)은 이들의 명단이다. 공은 정언에 앞서 병조정랑과 사헌부 지평을 역임했다. 공은 이후 지평으로 옮겼다가 다시 정언에 임명되는 등 사헌부와 사간원을 오가는 직책을 반복했다. 공은 정조 12년(1788) 3월 12일에 대관의 상소를 언급한 국왕의 조치에 시정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정언직에서 파직되었다. 4월에 귀양이나 다름없는 평안도 용강현령(龍岡縣令)에 임명되었다. 정조 16년(1792) 12월 18일 정조는 연곡상환을 연기시키라는 조정의 지시를 어긴 철산부사(鐵山府使) 신재문(申載文) 을 파직하고 후임에 공이 임명되었다. 정조에 명에따라 철산에 부임한 공은 장부상에 수 만석이 실제로는 1,000석 정도남아잊지 않아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였다. 공의 엄정한 일처리를 높이 펑가한 정조는 이후 여러차래 암행어사로 내보냈다. 영조의 박문수가 있다면 정조에는 류경이 있다 할 정도로 암행어사의 활약이 컷다고 평했다. 정조 23년(1799) 5월 7일 전라도 암행어사 직을 수행하고 돌아온 공은 잘못다스린 지방관들을 차등있게 처벌하도록 복명하는 별도의 보고서를 통해 전라도 지역의 민생피폐 실태를 알리고 그 대책을 건의했다 공은 정조 18년(1796)7월에 경기도사(京畿都事), 정조 20년(1798)에는 고산찰방(高山察訪) 등을 역임했다. 순조즉위년(1800) 8월 6일 비변사가 천거한 8명중 공이 포함되었다. 순조즉위와 함게 공은 삼사로 복귀했다. 정조에 위해 사간원 정원에서 파직된지 10년만에 일이었다. 종3품 사헌부 집의에 임명된 공은 영조의 계비로 대왕대비인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수령청정 체제하에서 정조조에 득세했던 남인과 노론 시파에 대한 공격을 주도했다. 이후 공의 기록은 한동안 실록에 나타나지 않는데 외직을 전전했을 것으로 보인다. 공의 이름이 다시 실록에 등장하는 것은 순조 6년(1806) 2월 13일로 당시 직책은 승지였다. 공은 순조 7년(1807) 1월 27일 순조의 할머니가 되는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의 동생 홍낙임(洪樂任)의 관직을 복구하라는 순조의 명을 반대했다하여 추자도에 압송하라 명했다가 바로 철회하여했다. 공은 이해 9월 평산부사에 임명되어 다시 외직으로 나갔다가 다음해인 순조 8년(1808) 5월 29일 의주부윤(義州府尹)에 임명되었다. 순조 11년(1811) 2월 홍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승정원으로 복귀했다. 순조 14년(1814)정월 초하루 가선대부로 품계가 올랐다. 가선대부는 종2품이다. 이어 형조참판을 거쳐 순조 15년(1815) 4월 양주목사로 잠시 있다가 이해 7월 4일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이후 의금부사와 병조참판을 거쳤으며 순조 19년(1819) 2월 9일 타계하니 향년 64세 였다. 묘는 광주 대왕면 노상동 경좌에 모셔졌다.

 

현종 5년(1839) 12월 10일 대왕대비인 순조비 순원왕후(純元王后)의 명에 의해 공의 효행을 기르기 위한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배위는 두 분으로 첫 배위는 진사 이서(李垿)의 딸 함평이씨 로 아들 상용(相鏞)과 딸 한분을 낳고 36세에 타계했다. 후배는 심현진의(沈憲鎭)의 딸 청송심씨다.

 

참고문헌 : 「정조실록」 「순조실록」 「헌종실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