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없음

 

   수재공 류 향(守齋公 柳 珦)

 

 

안간공 류혜손(安簡公 柳惠孫)은 현복군 권렴(玄福君 權廉)의 따님인 안동권씨 순인대군 왕상(順仁大君 王瑺)의 따님인 開城王氏, 화평군 김광철(化平君 金光轍)의 따님인 광산김씨(光山金氏)와 혼인하여 염(琰, 찬(瓚), 향(珦), 진(瑱)의 아들을 두었다. 호(號)는 수재(守齋)이다. 생졸연대(生卒年代)가 전해오지 않으나 충숙왕 복위 6년(1337)생인  포은 정몽주와 충숙왕 복위 7년(1338)생인 척약재 김구용 등과 절친했던 것으로 보아 그 연배(年輩)이거나 연하(年下)로 짐작된다. 公의 원래 이름자 珦이 조선조(朝鮮朝 5대(五代) 임금인 문종(文宗)의 이름과 같아 후손들이 기휘(忌諱)로 옥(玉)변를 빼고 公의 이름을 족보에 향(向)으로 기록하였다.

 

公은 고려 공민왕 때 과거에 합격한 뒤 군량미 등 군수물자를 관리하는 군자시(軍資寺)의 종4품 군자소윤(軍資少尹)과 수안군사(遂安郡事)를 지내고 수문전 학사(修文殿 學士)가 되었다. 수문전은 國王을 사종(侍從)하고 역대의 문서를 관리하며 경전을 강론하는 관청으로서 文臣으로 학문에 재주가 출중한 사람을 선발하여 학사를 겸직하게 하였다.

 

이후 관동안찰사(關東按廉使)를 거쳐 정4품 개성소윤(正四品 開城少尹)을 역임하였다. 깁구용(金九容)이 公이 안렴사로 떠날 때 시를 지어준 것에 미루어 관동안렴사에 부임했던 때는 1384년 이전으로 추정된다. 동문선(東文選)에 8편의 詩가 수록될 정도로 뛰어난 시인(詩人)인 김구용은 우왕 10년 행례사(行禮使)로 명나라로 갔다가 그해(1384) 중국에서 47세를 일기(一期)로 객사(客死)했기 때문이다. 「척약재학음집,惕若齋學吟集」에 ‘송류염사(送柳廉使)’라는 제목의 이 시에는 ‘예성과 여읍에서 많은 사랑을 베풀었으니[蘂城驪邑多遺愛(예성여읍다유애)]’라는 구절이 나온다. 예성과 여읍은 지금의 수원과 여주를 일컫는다. 이로 미루어 公이 관동안렴사에 앞서 수안군사(遂安郡事) 외에 예성과 여읍에서도 목민괌(牧民官)을 지냈음을 알 수 있다. 公은 고려 말의 역성혁명기(易姓革命期)에 조정의 요직에 있으면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지조를 굽히지 않았기 때문에 아버지 안간공과 더불어 모진 고난과 시련을 겪었으며 창왕 1년(1389) 11월 김저(金佇)의 이성계 암살기도 사건이 일어나자 이성계 일파는 대규모 옥사를 일으켰는데 이 옥사에 연루시켜 公과 안간공(安簡公)을 포함한 27명이 유배되고 이 때 형인 염(琰)도 그 장인인 철성부원군 이림(李琳)과 함께 유배되었다. 公의 3父子가 이성계일파의 주요 제거대상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공양왕 4년(1392)에 종4품 사헌부 장령(從四品 司憲府 掌令)에 임명되었는데 이방원이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격살한 직후 회유책의 일환이었다.

 

1392년7월18일 이성계는 수창궁에서 즉위한지 열흘 뒤인 7월 27일 개국교서(開國敎書)를 발표하면서 개국을 반대한 주요 인물 56명에 대한 처벌을 명시하였는데 公이 父親인 안간공과 함께 들어 있다. 公에 대한 처벌은 직첩을 회수하고 장형(杖刑) 집행과 귀양 보내는 것이었으며 도은 이숭인(陶隱 李崇仁)과 목은 이색(牧隱 李穡)의 아들 이종학(李鐘學)은 장형(杖刑) 집행과 귀양 보내는 처벌을 받고 결국 장살(杖殺)되고 말았다. 56명의 명단에 속했던 사람들 중 상당수는 세월이 지난 후 조선왕조의 회유책을 받아들여 새 왕조에 出仕하였으나 公은 부친인 안간공과 함께 고려조에 대한 절의를 굽히지 않았으며 경기우도 관찰사(京畿右道 觀察使)에 임명(태종실록1년, 1401)되었으나 出仕하지 않았다.

 

公은 포은 정몽주, 척약재 김구용과 각별한 친교를 맺었음을 그들이 남긴 시(詩)를 통해 알 수 있다. 公이 관동안렴사로 나갈 때에 정몽주는 ‘류 안렴사 향을 전송하며 지은 이절[송유안렴사 향 이절 / 送柳按廉使 珦 二絶]’ 이라는 제목아래 7언절귀시 두 편을 지었다. 「포은집」에 수록된 이 詩에서 정몽주는 ‘한 구비 경호 물을 볼 수 있도록 초청해 준다면 나중 어느 해 하지장이 되어 줄거요[일곡경호여허아, 他年當作賀知章], 라고 읊고 있다. 하지장(賀知章)은 당 현종 때의 시인으로 이백 재능을 현종에게 천거한 인물로 유명하며 허물없는 사이가 아니면 하기 힘든 표현이 아닐 수 없다.

 

公의 배위는 전교 이복시(典書 李復始)의 따님인 성주이씨(星州李氏)로 6남3녀를 두었다. 첫째 지함(之涵)은 군사(郡事), 둘째 지연(之演)은 직장(直長), 셋째 지점(之漸)은 사직(司直), 넷째 지관(之灌)은 영유현령(永柔縣令), 다섯째 지윤(之潤)은 음죽현감(陰竹縣監)을 역임, 여섯째 지옥(之沃)은 무후(无後)이다. 첫째 딸은 부사 신천인 강생민(府使 信川人 康生敏)에게, 둘째 딸은 부정 안동인 권상공(副正 安東人 權尙恭)에게, 셋째 딸은 사정 청주인 이중부(司正 淸州人 李仲扶)에게 출가했다. 이중부의 외동딸이 영의정 능성인 구치관(領議政 綾城人 具致寬)에게 출가했으니 公의 외손녀 사위다.

 

묘소는 선영(고양 화전)에 모셔졌으나 실전되어 1969년 아들 영유공(永柔公)과 함께 설단되어 있다.

 

참고문헌 :「고려사」,「태종실록」,「포은집」,「척약재 학음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