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없음

 

   호은공 류동량(壺隱公 柳棟梁)

       (광해군12년~숙종13년, 1620~1687)        

 


 

公은 광해군 12년(1620) 통덕랑 류여주(通德郞 柳汝舟)와 부사 최지흡(府使 崔旨洽)의 따님인 전주최씨(全州崔氏)의 2남4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字는 대임(大任), 號는 호은(壺隱)이다. 조부는 선무랑 담(宣務郞 潭), 증조는 선무원종공신 효원(孝元), 고조는 증대사헌공 광조(光祖)이며 시윤공 척(惕)이 8代祖가 된다. 公은 어려서부터 하나를 배우면 열을 깨우치는 신동이었다. 명(明)의 사신과 시(詩)를 겨룰 정도로 문장에 뛰어난 죽음 조희일(竹陰 趙希逸) 밑에서 글을 배우면서 公의 학문적 재능과 천재적인 문재(文才)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불과 9세 때에 오강에서 항우를 조문한다.[오강조항우, 烏江弔項羽 ]라는 제목의 시를 썼으며 10세 미만에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비롯한 주요 고전들을 섭렵했다. 公은 10세 이후에는 시(詩), 부(賦), 책(策) 등 각종 형식의 문장을 짓기 시작했고 세인의 주목을 받는 문장가로 빠르게 성장했다. 公은 11세(1630)에는 화상운대조(畵像雲臺詔)를, 12세(1631)에는 독행불괴영부(獨行不傀影賦)를, 13세(1632)에는 화왕기(花王記)를, 14세(1633)에 잡설(雜說)을 지었는데 이들 작품들은 심오한 철학적 내용을 유려한 문장 속에 담아 10대 초반에 지은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이다.

 

公의 작품에 대해서는 公의 스승이 되는 죽음공(竹陰公) 외에 당대의 문장가로 명성이 높았던 종숙(從叔)인 명주 여각(明洲 汝恪), 한평군 이경전(韓平君 李慶全), 계곡 장유(谿谷 張維) 등이 평(評)을 남겼다. 종숙인 여각은 월사 이정구를 수행하여 明에 갔을 때 그 글이 월사와 더불어 명나라 학사의 기림을 받아 그곳에서 문집을 내주었을 정도로 뛰어난 문장가였다. 이경전은 선조조 문장팔가(宣祖朝 文章八家)의 한 사람인 이산해(李山海)의 아들로서 문필(文筆)로 이름이 높았으며 장유(張維)는 월사 이정구(月沙 李廷龜), 택당 이식(澤堂 李植), 상촌 신흠(象村 申欽)과 더불어 ‘상월계택(象月谿澤)’으로 불리는 한문 4대가(漢文 四大家)의 한 사람이다. 이들은 公의 문장을 두고 ‘끝없이 넓고 푸른 장공에 비유하기도 하고, 뢰정(雷霆; 우뢰와 번개)과 같다고 감탄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용사(龍蛇)와 기린(麒麟), 그리고 만리장성을 끌어대어 논평하는 등 극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公은 시(詩)와 문장(文章) 어느 쪽에도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고르게 뛰어났다. 公은 일생동안 시(詩), 표(表), 부(賦), 책(策), 묘지(墓誌) 등 수많은 문고(文庫)를 남겼으나 그중 많은 유고(遺稿)가 병란(兵難) 등으로 유실되었는데 증손 만화(萬和)가 영조 29년(1753) 公의 글 중에서 뽑은 29편의 「호은문집」을 公의 10대손(十代孫) 기형(起衡)에 의해 발간하였다.

 

公은 제15대 광해군 때에 태어나 인조, 효종, 현종, 숙종 등 5대 임금의 치세를 살았는데 사색당쟁(四色黨爭)이 가장 격심하게 벌어진 시기였으며 세력을 떨쳤던 북인세력은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세력에 의해 철저하게 숙청, 제거되어 북인 문중은 서인세력에 의해 과거(科擧)에 의한 출세 길이 봉쇄되었다. 종숙인 문옹(교리)공 여항, 헌납공 여각은 권신(權臣) 이이첨 등의 대북 강경파와 반목하였지만 삼사(三司) 청요직을 지내는 등 북인세력에 속했기 때문에 인조반정 이후 한직(閒職)을 전전(輾轉)해야 했으며 그 여파는 종질인 公에게도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公은 16세인 인조 13년(1635) 사마시(司馬試)에서 장원(壯元)으로 합격하여 생원(生員)이 되었고 다음해 별시(別試)에 응시하였는데 한평군 이경전이 상시관(上試官)이었으며 公을 장원으로 선발하려 하였으나 서인에 속하는 참시관(參試官)이 허두(虛頭: 글머리)에 ‘탄(誕)’자를 사용한 것은 망발이라고 트집 잡아 낙방되었고 20세 되던 인조 17년(1639) 별시(別試)에서도 장원(壯元)으로 선발되었으나 ‘병자책문(兵字策文)’의 허두에서 조정의 정사를 조롱했다 하여 또 낙방시켰으며 23세 때인 인조 20년(1642) 정시(廷試)에서도 합격하였으나 우정 점수를 깎아 낙방시켰다. 公은 우수한 능력과 자질을 갖추었음에도 당색(黨色)으로 관계진출이 아예 봉쇄되자 이를 단념하고 23세 이후 학문과 저술에 전념하였다. 그중 ‘호은문집’에 실려 있는 ①당나라 마주(馬周)가 감찰어사(監察御使)를 사양하는 표문(表文)에 대한 의작(擬作), ②한나라 처사(處士) 강굉(姜宏)이 견사도(遣使圖)를 사양하는 표문에 대한 의작(擬作), ③과시(科試) 등은 당시 부조리한 정치 현실과 과거제도의 모순과 비리에 대한 우회적 비판이었다. 숙종 13년(1687) 12월 21일 타계 하니 향년 68세였다. 교하 주산 임좌(交河 酒山 壬坐)에 모셔졌으며 公의 행장(行狀)은 대제학 강현(姜鋧)이 지었다. 배위는 호군(護軍) 황서의 따님인 창원황씨이나 므후(無後)로 종형인 생원 동형(生員 棟亨)의 아들인 당질 한익(堂姪 漢翊)을 양자로 맞아들여 代를이었고 배위는 성주이씨(星州李氏)로 숙부인 교지(淑夫人 敎旨)를 받으셨으며 명진, 명관(明晉, 明觀) 두 아들을 두었고 증손자 만화(萬和)는 문장명세(文章鳴世)를 떨쳤음은 물론 진주류씨 최초 족보 병자보(晉州柳氏 最初 族譜 丙子譜) 발간에도 기여하였다.

 

참고문헌 : 「호은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