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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옹공 류비연(浦翁公 柳斐然)

       (인조5년~숙종11년, 1627~1685)        

 


 

인조 5년(1627) 2월 증병조참판 선전관 류신걸(柳信傑)과 충무공 김응하(金應河)의 따님인 안동김씨의 3남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字는 문중(文仲), 號는 포옹(浦翁)이다. 조부는 충경공 형(珩), 증조는 증병조판서 경원부사공 용(溶), 고조는 정민공 진동(辰仝)이며 외조부 요동백 김응하 장군(遼東伯 金應河 將軍)은 광해군 11년(1619) 3월 明의 요청으로 조선지원군(도원수 강홍립)의 좌영장으로 요동 심하 전투에서 후금군(後金軍)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公은 약관 20세인 인조 24년(1646)에 무과에 합격하였고 효종 원년(1650) 7월 도총도사(都摠都事)에 효종 2년 해남현감으로 현종 1년(1660) 6월 숙천부사(肅川府使)와 덕원부사(德源府使)의 외직에서 公은 39세가 되던 현종 6년(1665) 4월 임금이 온양온천으로 행차할 때 별장(別將)으로 지휘했는데 이 때 야당공은 어영대장으로 어영군(御營軍)을 지휘했다. 전라우수사로 나간 公은 현종 7년(1666) 전남 완도군 고금면에 있는 충무사(忠武祠)를 중수하고 충무공 이순신장군(忠武公 李舜臣將軍)과 진도독(陳都督)을 배향하였다. 이해 11월 암행어사의 선정 보고에 따라 숙마(熟馬: 길이 잘든 말)를 하사받았으며 현종 8년(1667) 3월 충청병사로, 현종 10년(1669) 5월 북병사(함경북도 병사)에 이어 삼도수군통제사에 전임되었다. 公은 현종 11년(1670) 현종비 명성왕후(明聖王后, 1642~1683)의 4촌 오빠인 김석주가 전라감사 김징의 모친 회갑연 때 과도한 선물을 보냈다는 이유로 탄핵하여 통제사에서 파직되었다가 현종 12년(1671) 7월 충청병사에 임명되었고 현종 13년(1672) 12월 평안병사에 전임되었는데 현종 14년(1673) 2월 임지로 떠나는 公을 접견한 임금은 “평안도의 군정을 포기한지 오래 되었으므로 급할 때 의지할 곳이 없다. 지금 군병을 모아 열무(閱武)를 할 수는 없더라도 혹 사냥한다고 핑계대거나 하여 군병을 모아 강습하도록 하라” 고 지시하자 公은 “마땅히 형세를 보아 하겠습니다.” 하였다. 숙종 2년(1676) 3월 임금은 경기수사로 임명되어 있던 公의 이름을 직접 거명하여 숙종 3년(1677) 2월 강화도 교동도(喬桐島)의 水營에서 북쪽으로 떨어진 화개산성(華蓋山城)을 수축(修築)하였는데 빠른 시일 내에 산성수축을 완성하기 위해 강화도민에게 산성수축 노역일수(勞役日數)만큼 세금을 감해 주겠다는 계책으로 하루 만 명에 가까운 장정이 참여하여 단기간 내에 완성하였다.

 

公은 이어 북병사로, 전라우수사와 삼도수군통제사, 충청병사와 경기수사, 평안병사와 북병사 등 남북방의 주요 병영은 물론 중부와 수도권 등 8도 전역의 군사 주요 직책을 두루 거쳐 公을 일컬어 ‘8도 병사 역임(八道 兵使 歷任)’이라 표현했다. 公은 북병사로 있으면서 淸의 동향을 예의주시했으며 이상한 동향이 있을 때마다 장계(狀啓)와 사신(私信)을 통해 조정에서 이를 공론화하도록 했으며, 公이 淸의 심상치 않은 동향을 보고한 때부터 청(淸)의 숨은 의도를 파악하는데 조정이 적극적으로 나서고 대책을 마련했더라면 숙종 38년(1712)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가 세워지더라도 보다 우리에게 유리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公이 장계를 올린 다음해인 숙종 6년(1680) 3월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야당공이 군권을 박탈당한 뒤 사사(賜死)되었고 公 역시 투옥되어 한동안 벼슬길에서 물러나 있어야 했다. 숙종 6년 9월 오시수(吳始壽)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獄에 갇히는 몸이 되었는데 이는 숙종 1년(1675) 청나라 사신으로부터 들은 ‘군약신강(君弱臣强: 조선은 군주는 약하고 신하가 강하다)’이라고 한 말을 조정에 보고했던 것이 문제가 되어 벌어졌다.

 

公은 당시 평안병사로 원접사의 청나라 사신 영접을 뒷바라지 했을 뿐이었다. 숙종 9년(1683) 6월 장단부사에 임명된 뒤 외조부(外祖父)이신 요동백 충무공 김응하장군(遼東伯 忠武公 金應河將軍)의 친손자(親孫子) 김세귀와 함께 철원군 화자리에 있는 포충사(褒忠祠)에 공덕비를 세웠으며 그 후 다시 평안병사로 전임되었는데 숙종 11년(1685) 3월 병조가 公이 장단부사 시절 분양마(分養馬)를 병들고 상하게 하였다는 이유로 품계를 낮추고 평안병사도 교체할 것을 주청하였으나 숙종은 “이와 같은 때에 서쪽 변방의 중요한 직책을 가벼이 교체할 수 없으니 품계를 낮추지 말고 그대로 유임시키는 것이 옳겠다.”며 이를 일축했다. 公은 이러한 논의가 있은 지 불과 보름 뒤 진중에서 향년 59세의 일기(一期)로 타계하시니 祖父 충경공(忠景公)과 재종조부 충장공(再從祖父 忠壯公), 숙부 진양군(叔父 晉陽君)도 진중에서 순직하신 진충보국(盡忠報國)의 표상(表象)이 되었다. 公은 국경 방어태세의 체계화에 힘썼고 임진왜란 때는 지방군으로 조직된 속오군(束伍軍: 조선 초기의 오위군〈五衛軍〉 편제)체제를, 청천강 이북지역에 병사의 직할부대인 연별대(演別隊)를 창설하기도 했다.

 

配位는 부호군 이의용의 따님인 전주이씨로 슬하의 성노(星老)는 전라우수사를, 성수(星壽)는 동지(同知)를 지냈다.

 

참고문헌 : 「현종실록」, 「숙종실록」, 「비변사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