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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의공 류병연(忠毅公 柳炳然)

       (인조3년~숙종7년, 1625~1681)        

 


 

公은 증병조참판 금사공 류충걸(錦沙公 柳忠傑)과 직장 이원영(直長 李元英)의 따님인 전주이씨의 아들로 인조 3년(1625) 1월 공주에서 태어났다. 금사공의 첫 배위인 능성구씨(綾城具氏) 所生인 연산공 환연(連山公 煥然)이 이복형이다. 字는 문숙(文叔), 號는 문암(文庵)이며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公의 고조는 공조판서 정민공 진동(貞愍公 辰仝), 증조는 증병조판서 경원부사공 용(溶), 조부가 충경공 형(忠景公 珩)이다.

 

公은 24세이던 인조 26년(1648)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으며 효종 2년(1651) 도총부 도사(都摠府 都事), 경력(經歷) 등을 역임했으며 흥양현감에서 다시 내직인 경력(종3품)을 지낸 뒤 해미현감으로 나갔으며 청렴하게 목민관의 임무를 수행한 것이 평가되어 정3품 상계인 통정대부의 품계를 받았다. 公은 현종 5년 1월 비변사(備邊司)에 의해 장령(掌令)에 선발되었고 춘당대(春塘臺) 활쏘기 시합에서 장원을 차지, 종2품 하계 가선대부에 승급한 뒤 홍주영장(洪州營將)에, 현종 6년(1665) 4월 춘천방어사(춘천부사 겸직)로 임명되어 흉년으로 인한 백성을 구제하였으나 현종 9년(1668) 도사(都事)와의 다툼으로 파직을 당하였지만 2개월도 못가 도사와 감사(관찰사)가 도리어 처벌당함으로써 마병별장(馬兵別將)에 복직되어 현종의 온양 행차를 수행하였는데 公의 從兄인 야당공 혁연은 어영대장(御營大將)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북영(北營)에 주둔하면서 궁성(宮城)을 호위하였다. 公은 외직인 선천부사에 임명되어 현종10년(1669) 청국 사신이 오자 병자호란의 치욕을 마음에 새기고 칭병(稱病)하며 영접하지 않아 의주부윤(義州府尹)과 다툼이 벌어져 길주목사에 임명되었다. 현종 13년(1672) 公의 종제 포옹공 비연(從弟 浦翁公 斐然)은 평안병사에 임명되고 公은 남병사(南兵使)로 승진하여 적폐(積弊)를 일소하고 정령(政令)을 바로 세우려하자 감사와 마찰을 빚어 파직되었으나 곧바로 부총관과 포도대장을 역임한 뒤 전라수사에 이어 숙종 6년(1680) 삼도통어사(三道統禦使), 훈련도정(訓練都正)을 거쳐 부총관(副摠管)으로 있던 중 숙종 7년(1681)에 타계하니 향년 57세였다.

 

숙종은 公의 부음을 듣자 보사원종공신(保社原從功臣)에 책록하고 형조판서를 추증하였다. 公의 시신을 염(殮)할 때 등에 ‘정충보국(精忠報國)’이라는 글자가 먹으로 새겨진 것이 발견되었는데 公이 삼도통어사로 재직할 때 새긴 것이다. 임지인 강화도의 방비태세를 점검하면서 병자년과 정축년 호란 때 겪었던 참화를 생각하고 효종 때와 같은 군신간의 의리가 날로 약화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스스로 다짐하기 위해서였으며 후유증으로 종기가 나는 등 고생하였지만 이를 퍼뜨리지 말 것을 당부하였으나 公의 형님인 결망와공 담연(結網窩公 燂然)이 公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이것을 내가 말하지 않는다면 충성스런 내 아우의 이름이 없어질까 두렵다”며 스승인 우암 송시열에게 비문을 부탁하여 후세에 전하게 되었다.

 

公의 일생은 강직, 청렴, 그리고 의리라는 세 단어로 요약될 수 있다. 숙종 6년(1680)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남인(南人)세력이 대거 축출되면서 종형(從兄)인 야당공 혁연(野堂公 赫然)이 사사(賜死)되고 효종조에 등용되었던 많은 무반들이 벼슬에서 물러났다. 서인(西人)에 속한 公을 중용하려하자 “한 집안 사이에 화복(禍福)이 엇갈리게 되었으니 내 한 몸의 영광을 다행스럽게 여기고 이름을 드날리기 위해서 차마 나가 벼슬할 수 있겠는가“하면서 조정의 여러 대신들을 찾아가 읍소하자 대간에서 대의멸친(大義滅親: 대의를 위해 친족간의 사사로운 정을 끊어야 한다)의 자세에서 어긋났다 하여 탄핵할 움직임을 보이자 송시열이 보통사람으로는 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칭찬하며 탄핵 움직임을 저지하였다. 또한 公은 헛된 명성을 경계하였고 가난하고 곤궁한 자를 구제하였다. 公이 타계한지 116년이 지난 정조 20년(1796)에 조부에는 충경(忠景), 公에게는 충의(忠毅)라는 시호가 내려졌는데 충(忠)은 위신봉상(危身奉上) 즉 자신의 몸을 위태롭게 하면서 위를 받들었으며, 의(毅)는 강이능단(强而能斷) 즉 굳세면서도 결단성이 있음을 기린 것으로서 이들의 사적(史蹟)을 내각(內閣)의 「존주록(尊周錄)」에 기록하라고 정조가 하교함으로써 한 집안에서 6명의 충절(충경공 형, 충장공 림, 진양군 효걸, 좌랑공 지걸, 충의공 병연, 야당공 혁연)이 배출되었다. 公의 묘소는 세종시 장군면 하봉리 진곡 임좌(榛谷 壬坐)에 모셔져 있다. 公의 배위는 찰방(察訪) 윤형일의 따님인 칠원윤씨로 2남2녀를 두었는데 장남 성한(星漢)은 무과를 거쳐 충청병사를, 둘째 성하(星河)는 도총경력(都摠經歷)과 함평현감(咸平縣監)을 지냈다. 딸들은 부사 팔계인 정래장, 사인 홍종하에게 출가하였다.

 

참고문헌: 「현종실록」, 「현종개수실록」, 「정조실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