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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당공 류혁연(野堂公 柳赫然)

       (광해8년~숙종6년, 1616~1680)        

 


 

公은 광해군 8년(1616) 12월 황해병마절도사(兵使) 진양군 류효걸(晉陽君 柳孝傑)과 증영의정 의춘부원군 남이흥(宜春府院君 南以興)의 따님인 의령남씨(宜寧南氏)의 3男 중 둘째로 태어났다. 字는 회이(晦爾), 號는 야당(野堂), 시호(諡號)는 무민(武愍)이다. 조부는 명량과 노량해전에서 큰 功을 세운 충경공형(忠景公 珩)이며 증조는 증병조판서 경원부사공 용(溶), 고조는 정민공 진동이다. 父親은 인조 2년(1624) 반란을 일으킨 이괄을 질마재에서 격파하여 진무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公은 청소년기에 정묘・병자의 호란을 겪었으며 천거에 의해 도감천관에 임명되어 인조 22년(1644) 무과에 합격하여 선전관, 경력, 훈련원 부정 등을 역임하였으며 특히 글씨를 잘 썼고 묵죽화에 명성을 떨쳤다. 인조 27년(1649) 公은 문무전재(文武全才)로 선발되어 장래의 원수(元帥) 감을 천거하는 선발에서 3위를 차지하였고 효종 2년(1651) 만포첨사(滿浦僉使), 효종 3년(1652) 선천부사(宣川府使), 수원부사(水原府使)를 역임하였다.

 

무반(武班)으로서 公에게 도약의 계기는 청나라에서 8년 동안 볼모로 있던 효종이 재위 3년째부터 북벌정책을 구체화하면서 마련되었다. 효종 5년(1654) 公은 승정원 동부승지(공조담당) 겸 경연참찬관에 임명되어 무과출신이 국왕을 지근거리에서 보필하는 승지에 발탁되었고 효종 6년(1655) 병조를 담당하는 좌부승지를 역임한 뒤 외직으로 나가 경기수사, 황해, 충청병사를 역임하면서 이어 삼도수군통제사 겸 경상우수사에 임명하였고 효종 7년(1656) 중앙에 올라온 公은 어영대장과 공조참판 겸 포도대장에 임명하여 장차 公을 북벌의 중심인물로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후 주사당상 형·병조참판을 거쳐 한성우윤을, 효종 8년(1657)에 다시 공조참판을 지냈다. 公이 장수(將帥: 어영대장)의 직책에 오른 뒤에는 다른 직책을 맡더라도 항상 장수 임무를 겸직했다. 외곽의 방위를 대폭 강화하기 위하여 강화도, 안흥, 남한산성, 자연도(부천) 등의 성지의 보수와 군량을 비축하고 러시아의 침입을 대비하여 북방지역에 산성을 구축하는 등 군비 확충을 도모하였고 표류해 온 네델란드 하벨을 훈련도감에 수용하여 조총, 화포 등의 신무기를 개량, 제작하였다. 현종조에 들어서 公은 어영대장을 겸임하면서 형조참판, 오위도총부 부총관, 한성부좌윤을 역임하였고 현종 6년(1665)에는 어가를 수행한 功으로 자헌(資憲)으로 승품되었다. 현종 9년(1668)에는 훈련대장(訓練大將)과 훈련원지사(訓練院知事)를 겸임함으로써 公은 군부의 1인자가 된 것이다.

 

현종 11년(1670) 공조판서, 현종 13년(1672)에는 한성판윤, 현종 14년(1673) 다시 훈련대장, 한성판윤, 포도대장을 역임하였다. 현종이 서거한 이듬해인 숙종 1년(1675) 장군직을 사임하였으나 오히려 판의금부사로 중용되고 훈련대장을 겸임한 뒤 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숙종 4년(1678) 훈련대장에 총융사를 겸하여 유비무환(有備無患)을 강조하였다. 숙종 2년(1676) 남한산성, 송도 천마산에 대흥산성을 축조하고 숙종 5년(1679)에는 화차(火車)를 만들어 대규모 열무식(閱武式)을 개최하였다. 그러나 숙종 6년(1680) 왕의 외척인 김석주의 주도로 경신환국(庚申換局)이 이루어지면서 公은 모든 직책을 박탈당하고 만다. 경신환국은 숙종 1년(1674) 인선대비 사후 벌어진 제2차 복상문제에서 승리하여 집권세력이 된 남인 세력(南人 勢力)을 몰아내기 위해 외척과 서인 세력(西人勢力)이 손을 잡고 일으킨 정변으로 公은 결국 경상도 영해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제주 대정으로 옮겨진 뒤 향년 65세에 사사(賜死)되었다. 제주에서 賜死된 公은 한강변에 고장(藁葬: 가매장)되었다가 숙종 15년(1689)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신원된 뒤 우의정에 추증되었고 충청 진잠군 하남면 백목동(현재 대전광역시 유성구 진잠동)에 모셔졌으며 신도비문은 규장각 직각 이의국(直閣 李義國)이 시장(諡狀)은 영의정 문숙공 현암 채제공(文肅公 樊巖 蔡濟恭)이 지었으며 ‘야당유고(野堂遺稿)’가 있다.

 

배위는 현감 이억(縣監 李繶)의 따님인 전주이씨(全州李氏)로 2남1녀를 두었고 둘째 배위는 사인 이여기(舍人 李汝杞)의 따님인 전의이씨(全義李氏)로 무후(無後)이다. 아들 성명(星明)은 음사(蔭仕)로 출사(出仕)하여 선산부사에 올랐고 딸은 군수를 지낸 풍산인 심숙에게 출가했다. 수원백씨(水原白氏)와의 사이에서 3남1녀를 두었는데 첫째 성원(星遠)은 무후이고 둘째 성상(星相)은 용양위 부사과를, 셋째 성화(星華)는 첨사를 지냈다. 딸은 동지 전주인 류익에게 출가했다.

 

참고문헌 : 「효종실록」, 「현종실록」, 「숙종실록」, 「연려실기술」, 「당의통략」, 「야당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