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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양군 류효걸(晉陽君 柳孝傑)

       (선조 27년~인조5년, 1594~1627)        

 


 

公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2년 뒤인 선조 27년(1594) 8월 충경공 류형과 군수 이구순의 따님인 전주이씨 사이의 3남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字는 성백(誠伯), 봉호(封號)는 진양군(晉陽君), 시호는 장의(壯毅)이다. 조부가 증병조판서 경원부사공 용(溶), 증조가 정민공 진동, 고조가 증좌찬성 진사공 한평이다. 금사공 충걸이 형이며 선전관 신걸이 아우이다. 좌랑공 지걸, 경력 제걸이 이복 아우이다.

 

公은 25세 때인 광해군 10년(1618) 무과 장원으로 합격하여 조부 溶도 무과 장원이었으니 조손(祖孫)이 무과 장원을 한 것이다. 때마침 청(淸)나라의 세력이 강성해지자 명(明)나라의 요청으로 강홍립을 도원수로 한 지원군을 요동으로 보내게 되었는데 강홍립은 公을 수행막료로 지명하였으나 이를 거절하자 公을 징벌하려고 하자 公의 동생 지걸(智傑)이 대신 지원하여 요동 심하(遼東 深河)전투에서 전사(戰死)하자 이를 자신의 죄라 자책하고 애석히 여겼다. 公은 무과 합격 불과 4년 후인 광해군 14년(1622)에 29세의 나이로 종2품인 황해병사에 임명되었다. 公이 황해병사로 재임 중인 당시는 이이첨 등 실권(實權)을 장악한 대북 강경파와 서인세력 간에 당쟁이 격화되고 있었고 영창대군(永昌大君 弑害)과 인목대비 서궁 유폐(仁穆大妃 西宮 幽閉) 등 패륜(悖倫)과 昏政을 명분 삼아 반정모의(反正謀議)를 은밀히 추진하고 있었는데 公을 참여시키려 종용하자 “이것이 나라를 위한 거사인 만큼 내가 굳이 계획을 방해하지는 않겠다. 나는 본시 정도(正道)만 알뿐 권도(權道)를 모르기 때문에 여기에 따를 수 없다.”라고 하였다. 광해군 15년(1628) 3월 거사에 성공한 서인세력은 선조의 손자인 능양군(陵陽君)을 새 임금으로 추대하였는데 이것이 인조반정(仁祖反正)이다. 公은 타고난 성품이 곧고 엄격하여 공사(公私)에 있어 원칙을 고수하며 불의(不義)와는 조금도 타협하지 않았다. 인조반정후 집권한 서인정권이 친명반청(親明反淸) 정책을 취함에 따라 淸과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었다.

 

인조 1년(1623) 관북지방의 경비를 강화하기 위해 장만(張晩)을 도원수로 이갈(李适)을 부원수로 한 전시대비 체제를 갖추었는데 公은 장만 휘하의 별장(別將)으로 나가게 되었다. 장만 휘하의 부원수 겸 평안병사로 영변에 나가 있던 이괄이 반정의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불만을 품고 인조 2년(1624) 1월 반란을 일으켰는데 公은 이때 반군에게 포위되었으나 곤편(棍鞭: 뭉둥이와 채찍)으로 적장(賊將)을 타살하고 말을 빼앗아 탈출하였다. 인조는 公州로 몽진한 가운데 반군은 서울에 입성하여 이괄은 선조의 열 번째 아들인 흥안군 제(興安君 瑅)를 왕으로 추대하고 논공행상을 하고 있는 가운데 관군(官軍)은 도성 밖의 질마재(현재 무악재 일대)에 포진하여 반군(叛軍)과 10일간의 결전 끝에 승리함으로써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데 公이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인조 2년 실록을 보면 “질마재 전투의 전공은 누가 제일인가”하는 인조의 물음에 독전어사(督戰御使)로 현장을 목격한 최현(崔晛)은 정충신, 남이홍, 류효걸, 이희건이 힘써 싸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괄의 난 전투에서 公과 나이와 모습이 비슷한 산수(山水)라는 시중드는 노복(奴僕)이 있었는데 公이 적에게 포위되어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을 때 노복이 公으로 위장하여 싸우다 죽음으로써 公이 사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진양군 종중에서는 公의 묘 근처에 산수의 묘를 마련하고 세일사 때 제물을 올리고 제향해오고 있다.

 

인조 2년(1624) 3월 이괄의 난 평정으로 진무공신 2등 공신(振武功臣 二等 功臣)에 책록되고 진양군으로 봉작되었으며 안악군수(安岳郡守)로 나갔다가 인조 3년(1625) 부총관 겸 중군(副摠管 兼 中軍)에 임명되었고 서쪽의 방비가 심상치 않자 병중에 있었으나 인조 4년(1626) 경기수사에 임명되었다. 인조 5년(1627) 公의 병세가 위중해지자 임금은 완풍군 이서(完豊君 李曙)에게 ”이 사람은 내가 의지하는 사람인데 이제 병이 깊어졌으니 참으로 나라의 불행이다.“라며 애석해 하고 내의원에 명하여 약을 내리도록 하였다. 公은 오랜 병고 끝에 인조 5년(1627) 8월 향년 34세의 젊은 나이로 타계했다. 배위인 의령남씨 사이에 호연은 인천부사를, 혁연은 훈련대장과 공조, 형조판서를, 탁연은 재령군수를, 흘연은 운산군수와 부사를 지냈다. 公은 좌찬성에 증직되었고 헌종 5년(1840)에 장의(壯毅)라는 시호를 받았다. 公과 의령남씨는 천안으로 천묘하였는데 노복 산수(奴僕 山水)의 묘도 함께 이장하였다. 한편 公의 영정, 교지, 진무공신 녹권 등이 충남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 「인조실록」, 「헌종실록」, 「서정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