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없음

 

   금사공 류충걸(錦沙公 柳忠傑)

       (선조21년~현종21년, 1588~1666)        

 


 

公은 선조 21년(1588) 12월 충경공 류형과 군수 이구순의 따님인 전주이씨의 3남1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字는 신백(藎伯)이며 號는 금사(錦沙)이다. 조부가 증병조판서 경원부사공 용(溶), 증조가 정민공 진동(辰仝), 고조가 증좌찬성 진사공 한평(漢平)이다. 황해병사와 경기수사를 역임,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데 功을 세운 진양군 효걸과 선전관 신걸이 친아우이며 효종조 북벌계획의 주역 야당공 혁연이 조카이다.

 

公은 무인의 길을 택한 아우 진양군과는 달리 문과(文科)에 뜻을 두었으며 광해군 10년(1618) 인목대비 폐비 수의(收議: 공개토론)에서 폐모 주장에 끝까지 반대하다 유배를 당한 충정공 정홍익이 스승이다. 公은 광해군 5년(1613) 영창대군을 죽음으로 몰고 간 계축옥사(癸丑獄事)를 빌미삼아 권신(權臣) 이이첨의 사주(使嗾)를 받아 사헌부 장령 정조(掌令 鄭造) 등이 폐모를 주장하는 상소(上疏)를 잇달아 올리자 이들의 죄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도리어 처벌을 받았다. 백관(百官)과 종실(宗室)의 공개 수의(公開收議)를 거쳐 인목대비의 폐출이 결정된 광해군 10년(1618) 정월 이의 부당함을 상소하려하자 모진 곤욕을 치를까 우려한 모친 이씨부인의 간곡한 만류에 뜻을 굽히고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지만 외향(外鄕)인 공주로 낙향하였다. 公의 어머니는 공주에 세거(世居0한 도승지 이세장(李世璋)의 曾孫女이다. 인조 3년(1625) 역참(驛站)을 관리하는 종6품 외직 중림도(重林道: 인천) 찰방(察訪)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인조의 생부 정원군(定遠君)의 묘인 흥경원(興慶園)의 재랑(齋郞)으로 나가게 되었으며 정원군은 公의 장인인 능해군 구성(綾海君 具宬)의 매부이다. 인조의 생모로 인현왕후에 추봉된 능성구씨(綾城具氏)와 公의 장인은 남매간으로서 公은 인조에게 외사촌 매부이다.

 

인조 7년(1629) 이곳에 전배(展拜: 참배)한 인조는 왕으로 추대되기 이전, 허물없이 지내던 公을 알아보고 “너는 내 포의(布衣)적 친구이다.”라며 반가워했다고 한다. 인조는 등극하기 이전 궁 밖에서 살 때 7세 연상인 公과 농담을 주고받는 친밀한 사이였다. 公은 홍경원 재랑에서 물러난 뒤 경양도(景陽道: 전라도 광주) 찰방에 임명되었으며 후일 송덕비가 세워질 정도로 잘 다스렸다. 이후 내직인 직장(直長)으로 재직 중 인조 14년(1636)에 병자호란을 맞았다. 公은 인조 15년(1637) 궁궐에 나아가 병난을 당하여 죽음으로 적을 물리치지 못한 죄상을 아뢰고 벌 받기를 자청하였고 아울러 힘을 기르고 치욕을 씻을 방책을 담은 상소를 올렸다. 이 기록은 숙종 42년(1716)에 만들어진 존주록(尊周錄)에 실려 있다. 공은 이후 한성부 참군(漢城府 參軍)으로 임명되었다가 곧 상서원 직장(尙書院 直長)으로 옮기고 이어서 예빈시 별제(禮賓寺 別提)로 승직된 뒤 정6품 사헌부 감찰을 지냈다. 석성(石城)과 정산(定山)의 현감(縣監)을 거쳐 익위사 익솔(翊衛司 翊率)에 임명되었고 정5품 익위(翊衛)까지 올랐으며 현종 6년(1665) 4월에 타계하니 향년 79세였다.

 

배위는 능해군 구성(綾海君 具宬)의 따님인 능성구씨와 후배위는 직장 이원영의 따님인 전주이씨로 연산현감을 지낸 환연, 담연, 찬연, 병연, 계연 등의 아들과 딸을 두었다. 담연은 호조참판에 증직됐고 찬연은 봉사를 역임했으며 대사헌에 증직되었고 병연은 병마절도사와 삼도통어사를 지냈고 충의(忠毅)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계연은 무과에 합격하였다. 딸들은 부사 남양인 서한주와 여흥인 민양재에게 창녕인 성하준, 안익명, 무과 이수일에게 출가했다. 公은 정조 12년(1788) 병조참판 동지의금부사에 추증되었다. 公은 천성이 호쾌하고 불의에 항거하여 굽힐 줄 몰랐으며 숙덕노유(宿德老儒)로 자애심이 깊어 남에게 조금도 해되는 일을 하지 않았으며 자질(子姪)이 관직에 나갈 때면 “우리 집안의 가풍을 더럽히지 말라.”고 간곡히 당부하였으며 충과 효를 최대의 덕목으로 알고 이를 몸소 실천하였고 충효전가(忠孝傳家)・진충보국(盡忠報國)이라는 가훈(家訓)이 충실하게 전승되어 선대 가문의 명예가 후대에 끊어지지 않도록 하였다.

 

묘소는 세종시 장군면 대교리 해곡 임좌(亥谷 壬坐)에 모셔졌으며 신도비문은 조선조 대학자, 문장가이자 정치가로 추앙받는 우암 송시열이 찬(撰)하였으며 묘역과 신도비가 세종시 향토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글씨는 충장공 림(忠壯公 琳)의 둘째 아들인 도은공 지발(之發)이 썼다. 도은공은 公의 재종(再從) 아우이다. 公의 서간, 행장, 지, 시문을 한데 묶은 「금사실기(錦沙實記)」가 전해 온다.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 「인조실록」, 「현종실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