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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파공 류 희(西坡公 柳 僖)

       (1773~1837)        

 

 

공의 어릴적 이름은 경(儆)이었으며, 자는 계중(戒仲), 호는 서파(西坡)이외에도 방편자(方便子), 남악(南嶽), 관청농부(觀靑農夫) 등이 있다. 아버지 목천현감 한규(漢奎)와 어머니 사주당 이씨(師朱堂 李氏)와의 1남 3녀 중 아들로 태어났다. 문성공 순정(順汀)의 11대손이며 종손 혜정공 엄(儼)보다 80년이나 뒤에 태어난 동(同)항렬 14촌간이다.

 

공의 부모는 모두 학문에 조예가 깊었다. 공의 부친은 주역과 성리학, 역산과 율려(음악), 약방문, 바둑에 조예가 깊었으며 시문과 서예에도 능했다. 모친은 태교신기(胎敎新記)를 비롯한 많은 책을 저술한 여류학자로서 생전에 이미 문명을 떨쳤다. 공은 태어날 때에는 용모와 신체가 뛰어났으나 첫돌 무렵에 천연두를 앓은 이후 발육이 더뎌져 또래에 비해 행동과 말이 늦었는데 어머니 사주당 이씨는 성장이 늦은 아들 때문에 상심이 컸다. 그러던 어느 때 그의 영특함을 알아차린 모친은 본격적으로 글을 가르치기 시작하여 다섯 살이 되기 전에 이미 글을 지었고 성리대전과 같은 어려운 성리학 책을 읽고 이해할 정도로 영특하였으며, 13세에 이미 시부(詩賦)를 지었으며 구장산법(九章算法)을 이해하였고, 15세 때에는 역리복서(易理卜筮)를 꿰뚫었다.

 

11살에 부친을 여윈 공은 윤지헌(尹止軒)의 문인이 된 후 18세 때 향시에 합격한 뒤 사마시에 응시하였으나 이후 사주당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과거에 응시조차 하지 않았다. 사주당은 당파싸움으로 혼탁한 나라 정세에서 출사할 경우 그의 성정으로 보아 후일 화를 입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여 과거시험 보는 것을 극구 만류하고 적당한 곳에서 조용히 살면서 학문에 전념할 것을 권유하였는데, 이는 어머니의 절대적인 영향에 의한 것이었다. 공은 이러한 가르침에 청년기에는 고향 용인에서, 중년에는 단양에서, 말년에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타계할 때까지 농사를 지으며 학문에 힘써 근 100여권에 달하는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사주당이 공의 나이 49세 때 별세한 이후 누이의 간곡한 권유로 57세 때인 1829년에 문과에 합격하였으나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들어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공은 일찍이 성리학을 주로 하고, 춘추대의를 본으로 삼아 경서의 주석, 언어, 천문, 지리, 의학, 복서, 종수, 농정, 풍수, 충어, 조류 등에 두루 통달하였다. 일생에 걸쳐 저술한 100여권의 책은 「문통(文通)」이라는 이름 아래 초고의 형태로 남아 있다.

 

이들 저서들을 살펴보면 주로 「논어집주보설(論語集註補說)」, 「맹자고류정(孟子詁類訂)」 등 유교 경전들을 연구한 것이다. 특히 「춘추대지(春秋大旨)」를 비롯한 “춘추”에 관한 책이 20여권에 이른다. 다음에 「물명고(物名考)」, 「만물류(萬物類)」, 「시물명고(詩物名考」, 「물명유고(物名類考)」 등의 박물학서 들이 있고, 52세 때에 완성한 유명한 「언문지(諺文志)」를 비롯 「서자류(書字類)」, 「육서류설(六書類說)」 등의 문자론서들이 있다. 또한 「방편자구록(方便子句錄)」, 방편자문록(方便子文錄)」 등의 시문집 이외에 역사학, 음악, 수학, 농학, 기상학, 의약학 등에 관한 저술들도 있다

 

그는 전체적으로는 이전의 잘못된 것을 고증을 통해 바로잡거나 보충하되 우리의 것도 넣으면서 자신의 생각을 펼쳤으며, 중국의 정주학(程朱學)을 근본으로 삼았지만 이용후생에도 각별한 주의를 기울인 실학적인 유학자이자, 박물학자요 문학자였다. 특히 공의 방대한 저서 중 현존하는 「시물명고」, 「물명유고」, 「언문지」는 국어학사적 귀중한 사료로서 학계에서 깊은 관심 속에 연구 중에 있다. 공은 일찍이 실학자이며 정음학자인 현동 정동유(鄭東愈)에게 직접 사사하여 당대의 문자음운학에 일가견을 가지게 되었다. 언문지에서 한글의 음가를 초성(初聲), 중성(中聲), 종성(終聲)으로 분류하였으며 된소리 표기의 병서, 아래아의 음가를 ‘ㅏ, ㅡ’ 의 간음(間音)으로 볼  것, 사이 ㅅ표기 등을 주장하였는데 탁견으로 평가 받고 있다. 또한 정음의 문자구조가 정교하고 표음문자로서 훌륭함을 정확히 설파하였고, 훈민정음에 대한 천대를 한탄하여 후대의 학자들이 한글 발전에 더욱 분발해줄 것을 기대하였다. 바로 이 언문지로 인해 공은 신경준(申景濬)과 함께 조선 후기의 대음운학자로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공은 어머니 사주당 이씨가 1800년에 지은 「태교신기」를 10개의 장구로 나누고 언해(諺解)를 붙인 「태교신기장구대전(胎敎新記章句大全)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병약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일생동안 방대하며 깊이 있는 학문적 업적을 쌓은 공은 1837년(헌종3년)에 향년 65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배위는 두 분인데 첫 번째 배위는 전주 이씨이고, 두 번째 배위는 안동권씨이다. 공은 4남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성소, 성양, 성무, 성월이다.

 

공의 묘소는 용인군 모현면 왕산리 관청동에 모셔져 있다.

 

참고문헌 : 조선명인전 2권, 진주류씨 서파 류희 전서(한국학중앙연구원 발간), 진단학보 11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