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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오공 류극(霞塢公 柳)

       (1537 ~ 1604)        

 

 

公은 성균 진사 류형필과 참의 권기의 따님 안동권씨의 3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경시(景時), 호는 하오(霞塢)이다. 조부는 훈련원 봉사 정(汀)이고, 증조부는 재령군수 종한(載寧郡守 從漢), 고조는 돈녕부 부정 린(敦寧府 副正 潾)이다. 증조부 재령군수 종한은 진주류씨 일문의 파종(派宗)인 익양공 혜방(翊襄公 惠芳)의 8대 종손이며, 조부 봉사공 정은 재령군수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러나 종손 생원공 기(生員公 淇)가 기묘사호로 인하여 장형을 맞고 구성(현재 평북 구성시)으로유배된 후 사망하여 후사가 없음에 익양공의 종통(宗統)은 공의 조부 봉사공과 부친 성균 진사공에게 이어졌다. 생원공은 당숙인 용근(庸謹)과 함께 기묘명현록에 수록됐다.

 

기묘사화 3년뒤 공의 조부인 정(汀)이 무과에 장원했으나 훈구 세력의 집권이 계속되어 정8품 벼슬인 훈련원 봉사(奉事)라는 최 말단직에 머물렀다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갔던 공의 부친은 해주로 낙향하고, 외척의 발호로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부친의 뒤를 이어 해주로 낙향한 뒤 수양산에 들어가 은거하였다.

 

공은 37세가 되던 선조 6년(1573)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고 다음해인 선조7년(1574) 9월 24일 별시 문과에서 전체 5위에 해당하는 병과 2위(15명 선발)로 합격하였다. 공은 자손들의 교육을 위해 경기 양주로 거처를 옮긴 할머니 수안이씨(遂安李氏)와 모친 안동권씨(安東權氏)의 뒷바라지 속에서 실력을 기르다 선조 등극 이후 과거에 응시했던 것으로 추정된다.(현부 수안이씨와 현보 안동권씨 편 참조)내직인 사간원 헌납을 거쳐 순안(順安)군수로 있던 중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시 임금을 호종하여 의주로 피난 갔다가 선조가 공에게 “나를 호종하는 것보다 백성을 돌보는일이 급하다” 하교함에 임지로 돌아와 있던 중 평산부사로 특임되었다.

 

평산부사를 역임한 뒤 남원부사로 자리를 옮겼고 선조 28년(1595)12월 3일 사간원의 탄핵에 의해파직되었다. 전쟁이 소강상태에 이르자 전쟁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들을 제거하는데 골몰했던 조정 분위기상 공의 파직은 지극히 정치적인 것이며 대표적 인물은 익호장군(翼虎將軍) 김덕령(金德齡)이다. 이후 공은 홍주(지금의 홍성)목사와 종부시정(宗簿寺正)을 역임했다. 이때 공의 나이 78세였다

 

공이 언제 타계했는지는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 수 없고 묘는 경기 양주 진접면 주곡 대릉동(현재남양주시)에 기슭에 모셔져 있다. 배위는 계공랑(啓功郞) 최식(崔埴)의 따님인 화순최씨(和順崔氏)로 1남 4녀를 두었다. 선무랑(宣務郞)을 지낸 외아들 원배(元培)는 창문(昌文), 창언(昌言), 창진(昌辰) 등 3남 2녀를 두었는데 창문과 창진은 각각 문과에 합격하여 사헌부 장령과 통례원 상례를 지냈고,창언도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네 딸은 안몽린(安夢麟), 승지 배천인 조정견(白天人 趙庭堅), 전의인 이경(全義人 李勁). 참판 전주인 이구징(全州人 李久澄)에게 출가했다. 둘째사위 조정견은 선조 28년(1595) 12월 별시 문과에 합격했다. 장인처럼 38세 늦은 나이에 합격했지만 갑과 1위(15명 선발)로 장원 급제하였다

 

그러나 이달에 공이 남원부사에서 파직되니 집안에 경사와 우환이 겹친 셈이다 이 별시에 진주류씨 안간공파 대사헌공 경종( 大司憲公 慶宗)이 을과 1위를 차지했는데  전체 3위였다. 넷째 사위인 참판 전주인 이구징이 공의 묘지명을 썼다고 『기축보』에 기록되어 있다

이구징의 손녀 사위가 북부령공파 충장공 림(忠壯公 琳)의 아들인 목사공 지방(之芳)이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조선명신록』 『문과방목』 『인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