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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사공 용근(鏞謹)

       (1485 ~ 1528)        

  

 

公은 성종 16년(1485)에 충정공 류빈(忠定公 柳濱)의 1남 3녀 중 외아들로 태어나셨으며 자(字)는 규복(圭復)이다. 조부는 증 좌찬성(贈 左贊成) 행 용양위 선전관(行龍驤衛宣傳官)인습(仁濕), 증조는 증 참판공(贈 參判公) 균(均), 고조는 진천군 자해(晉川君 子偕)이다.

 

공은 중종 2년(1507) 생원이 되고 33살이던 중종11년(1516) 10월 14일 식년시 문과에 병과13위로 (33명 선발)합격하였다. 급제 후 30개월 만에 종 2품 병마절도사에 오를 정도로 특진을 거듭하셨다.

공은 문무겸전한데다 당당한 풍채마저 갖추어 일찍부터 조야의 주목을 받았다.

 

공이 대과에 합격한 뒤 조정에서는앞으로 유장(儒將 : 문반출신 장군)으로 발탁할 인물을 천거하라 하였을때 병조판서 고형산은 “검열(檢閱) 류용근은 올해 급제하였으나 범상치 않고 나이도 젊지 않으니 이장곤의 전례처럼 평사(評事)로 발탁 임용해야 합니다”라고 공을 추천하였다.

 

이후 기사관(記事官), 정자(正字), 사간원 정언(正言), 홍문관 교리를 역임하며 경연관과 간관으로 맹활약하였다. 공이 맡았던 정자라는 직책은 비록 정9품이지만 홍문록을 통하여 별도 선발할 정도로 대표적 청직(淸職)이다 기사관 시절 경연에서 왕에게『근사록』을 강론하셨는데 함께 강론하였던 동료 경영관 기준(奇遵)과 임금으로부터 논한 바가 지당하다는 말을 들었다

 

공이 강론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가하고 고요하게 있으면서 사물에 접하지 않았을 때를 ‘신독(身獨)’이라 하고, 한 가지 생각이 발동하여 나만이 알고 있을 때를 ‘심독(心獨)’이라 하는 것이니, 희노애락(喜怒哀樂)이 발동하지 않았을 때 능히 존양(存養)을 다하고, 이미 발동하여서는 성찰(省察)을 지극하게 하는 것이 곧 근독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정자로 있을 때 원자(훗날 인종)의 교육지침서를 만드는데 참여하셨다 당시 최고 책임자는 홍문관 부제학 한효원(韓孝源)이었고, 홍문관 부수찬인 조광조 역시 공과 함께 참여하였다.

 

사간원 정언과 홍문관 교리로 있을 때에는 인사문제와 관련 삼공을 준엄하게 비판하였고 소학(小學)의 장려와 무오사화 이후 위축된 사림을 존중하도록 건의했다.

 

중종 13년(1518) 1월 북도의 평사로 임명되자 경연관인 그를 외직에 보내는 것이 부당하다는 말도 나왔으나 중종은 공이 경연관에 적합한 인물이라고 인정하였다. 이후 공은 홍문관 교리, 함경도 어사, 사간원 헌납, 이해 7월 홍문관 전한, 한달 뒤 정 3품 홍문관 직제학에 임명되었다. 공은 전한이 되었을때 너무 과분한 직책이라며 사직 상소를 냈으나 중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해 9월 재상경차관으로 함경도에 파견되어 삼수와 갑산의 공물 초서피(노랑가슴 담비가죽)를 감해 줄 것을 건의 관철했다, 11월에는 우승지에, 다음해인 중종 14년(1519) 5월에는 함경북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다. 이즈음 '기묘 제현 수필'의 서문을 직접 서술하셨다. 중종 14년(1519)에 반정공신 위훈삭제사건(중종반정공신 가운데 4분의3에 해당하는 76명의 공신 호를 삭탈하고 토지와 노비를 환수한 사건)을 계기로 발생한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피해를 입게 된다. 공은 기묘년 5월 이후 중앙정치무대에서 떠나 있었으나 신진사류들 내에서의 높은 위상과  조광조 못지않은 빠른 승진이 문제가 되어 화를 피할 수가 없었다. 결국 중종15년(1520) 임지에서 진원(珍原: 전남장성군진원면)으로 유배되었다. 중종17년(1522)에 연일(延日)로 유배지가 옮겨지는 중에 광주의 이자정(李自禎)의 집에서 술을 마신 것이 문제가 되어 추국의 건의가 있었으나 중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중종 18년 공의 모친이 무죄를 주장하는 글을 올린 것이 문제가 되어 처벌 요구가 있었으나 중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다 유배생활 8년만인 중종23년(1528) 귀양이 풀려 집으로 돌아오던 중 사망하였다 공이 숨을 거둔지 10년 뒤인 중종33년(1538)에야 복관되었다.

 

배위는 별좌 정홍선(鄭弘先의) 따님인 경주정씨(慶州鄭氏)이다 경주정씨와의 사이에서 외아들 성광(性光)을 두었다. 처조부는 계림군 제안공 정효상(鷄林君 鄭孝常고)며, 처 외조부는 영돈녕(領敦寧 )교하인 노공필(交河人 盧公弼)이다. 처고모부는 영의정 최항의 아들이며, 영의정 최홍원의 조부인 증 좌찬성 사옹원정 삭녕인 최영호(朔寧人 崔永灝)이다

 

공은 문성공 류순정과 부친 류빈 못지않게 문무를 겸전한 경륜있는 그릇으로 큰 활약이 기대되었으나 기묘사화라는 정치적인 소용돌이에 휘말려 자신의 꿈을 펴지도 못한 채 일찍 꺽이고 말아 안타깝다. 오랜 유배생활과 자신의 객사로 인하여 충정공의 묘가 실전된 것 역시 안타까운 일이다

2005년 후손들이 충남 당진군 순성면 중방리 선영에 충정공과 함께 설단하여 향화를 올리고 있다

 

참고문헌 : 『중종실록』『연려실기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