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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지공 류 공진(承旨公 柳拱辰)

       (명종2년~선조37년, 1547~1604)        

 

公은 명종 2년(1547)에 선원전 참봉 류자(璿源殿 參奉 柳滋)와 판중추부사 이행(判中樞府事 李荇)의 따님인 덕수이씨(德水李氏)의 2남중 큰 아들로 태어났다. 字는 백첨(伯瞻), 號는 이탄(鯉灘)이다. 조부는 증호조참판 광식(光植), 曾祖는 증호조참의 수(璲), 고조는 시윤공 척(惕)의 손자인 증통례원 좌통례 중손(贈通禮院 左通禮 仲孫)이다. 外祖父 이행(李荇)은 홍문관 대제학과 우의정, 좌의정을 역임한 중종조의 명신(名臣)으로 좌의정 재임 중 권신 김안로(權臣 金安老)의 전횡을 비판하다가 중종 27년(1532) 평안도 함종(咸從)으로 유배, 그 곳에서 죽었다. 公은 일찍이 율곡 이이(栗谷 李珥)와 우계 성혼(牛溪 成渾)의 문하생(門下生)이 되어 선조 3년(1570)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당시는 선조 8년(1575) 사림(士林=儒林)세력이 동서당파(東西黨派)로 나뉘어 사상적 대립을 하고 있었다. 西人은 서울, 경기, 호서지역(湖西地域)을 근거지로 하는 기호학파(畿湖學派: 이이, 성혼 등)와 영남을 근거지로 하는 영남학파(嶺南學派: 이황, 조식 등)기 쌍벽을 이루었다.

 

公은 37세이던 선조 16년(1583) 8월  성균관 생원 462명을 대표한 소두(疏頭)로서 스승인 율곡과 우계에 대한 동인 측(東人 側)의 공격과 인격적 폄하에 대한 반박으로 두 분의 경륜을 입증, 옹호하는 長文의 상소문을 올려 조정 양파(朝廷 兩派)간에 치열한 논쟁이 벌어져 박사 한인 (博士 韓戭)이 조정의 공론절차 없이 유생들이 상소했다 하여 과거 응시자격을 박탈하는 조치를 취했으며 公은 투옥되었고 병조판서인 이이가 올린 시무6조(時務六條)와 10만 양병(養兵) 주장을 문제 삼았으나 동인 측의 패배(敗北)로 끝났는데 이를 ‘계미삼찬(癸未三竄)’이라 한다. 성균관 유생 대표의 투옥과 과거 박탈 조치는 선조의 분노를 샀고 대사헌(大司憲) 이기, 대사간(大司諫) 박승일 양사(兩司)의 중심인물이 문책, 파직되었는데 公의 상소가 결과적으로 동인(東人)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었던 것이다. 옥(獄)에서 풀려난 公은 대과 별시 병과(大科 別試 丙科)에 합격하여 이조정랑(吏曹正郞)에 임명되었다. 吏曹正郞은 이조좌랑(吏曹佐郞)과 함께 전랑(銓郞)으로 통칭되며 삼사(三司)의 관원 임명 동의권(官員 任命 同意權)을 갖고 있어 이조전랑(吏曹銓郞)의 임면권(任免權)은 이조판서(吏曹判書)도 관여하지 못하고 전임자가 후임자를 추천토록 되어 있는데 이조전랑(吏曹銓郞)의 추천문제가 동서분당(東西分黨)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어 선조 24년(1591) 5월 서인(西人) 우의정 정철(鄭澈)이 건저문제(建儲問題: 왕세자 책봉문제)로 파직되어 경원으로 유배되었다. 선조 25년(1592)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배에서 풀려나 8월 예조정랑에 임명되고 10월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세자시강원보덕(世子侍講院輔德)을 겸임하였으며 같은 해 11월 부응교가 되었고 12월 홍문관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明나라에 다녀왔다. 선조 27년(1594) 7월 홍문관 응교로 승진한 公은  임금이 양명학(陽明學)의 신봉자인 이요(李瑤)를 불러들여 그 이론을 경청하고 있음을 우려하는 차문(箚文)을 올렸다. 해박하게 고금의 사례를 들어가며 그 부당성을 논박한 공의 차문에 선조(宣祖)는 “살펴보건대 학문의 고명함이 이와 같으니 참으로 가상하다. 앞으로 유의하겠다.”라는 답변을 내렸다.

 

선조 29년(1596) 4월 사섬시정, 승문원 판교, 선조 32년(1599) 7월 강원도 조도 겸 독운어사(江原道 調度 兼 督運御使)를 거쳐 종부시정(宗簿寺正)에 임명되고 선조 34년(1601) 5월 산릉도감 도청((山陵都監 都廳)의 직무를 잘 수행했다 하여 1자급의 가자(加資)를 받았고 동부승지, 우승지가 되어 임금을 측근에서 보필하였다. 선조 35년(1602) 파주목사, 선조 37년(1604) 1월 公은 서천군수로 파격적인 좌천을 당하자 사직한 후 3개월 뒤인 4월 25일 향년 57세로 타계했다. 公은 동서당쟁(東西黨爭)이 극심하게 전개됐던 와중에서 西人의 한 핵심인물로서 극과 극을 오르내리는 부침(浮沈)이 심한 관직생활을 역임하다 생(生)을 마쳤다.

 

配位는 병사 김오(金鋘)의 따님인 안동김씨(安東金氏)로 위(偉)와 준(儁) 등 두 아들과 두 딸을 두었다. 첫째 아들 위(偉)는 현감과 호조정랑을 지냈고 둘째 아들 준(儁)은 사용(司勇)을 역임했다. 두 딸은 남양인 홍명남(洪命男)과 청송인 심익세(沈翼世)에 출가했다. 신풍군 계곡 장유(新豊君 谿谷 張維)가 묘비명(墓碑銘)을 썼는데 공이 타계한지 25년 뒤에 쓴 장유의 묘비명 제목이 증이조판서대제학 행승정원우승지 휘공진 묘비명(贈吏曺判書大提學 行承政院右承旨諱拱辰 墓碑銘)인 것으로 보아 그 사이 이조판서와 대제학에 추증된 것으로 추정된다. 장유는 인조반정에 참여, 정사공신 2등(靖社功臣 二等)에 책록된 인물로 대제학과 우의정을 지냈으며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천문, 지리, 의술, 병서, 글씨에 능통했고 특히 문장이 뛰어났다.

公의 묘비명(墓碑銘)을 쓴 장유(張維)의 이력(履歷)은 기호학파와 서인 내(西人 內)에서 公의 위상(位相)이 상당했음을 확인시켜 준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 「역사인물고」, 「묘갈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