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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민공 류간(貞愍公 柳澗)

       (명종9년~광해군13년, 1554~1621)        

 

 

公은 명종 9년(1554) 11월 27일 증이조판서 류경원(柳敬元)과 현령 권금의 따님인 안동권씨의 2남3녀 중 長子로 경성 남부 훈도방 1리에서 태어났다. 字는 노천(老泉), 號는 후촌(後村)이다. 부친 경원(父親 敬元)의 생부(生父)는 증대사헌 광조(光祖)로 당숙(堂叔)인 증이조참판 제용감정 광훈((濟用監正 光勳)의 양자(養子)가 되었다. 증조는 증좌승지 송화현감 여(松禾縣監 璵), 고조는 시윤공 척(惕)의 손자인 통덕랑 장손(通德郞 長孫)이다. 公은 천성이 총명하여 유치(乳齒)도 갈기 전에 「효경(孝經)」과 「대학(大學)」을 이해한 보기 드문 신동(神童)으로 불과 15세에 성균관시(成均館試)에 합격하여 수재(秀才)로서의 명성을 드높였다. 公은 효심이 지극하여 시묘(侍墓)살이 하는 모습을 보고 이웃 사람들이 묘막(墓幕) 부근의 눈을 매번 쓸어주었다 한다.

 

선조(宣祖) 18년(1585)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고 선조 32년(1599) 6월 사복시 첨정(司僕寺 僉正)에 임명되었으며 같은 해 7월 46세의 나이로 별시 병과(別試 兵科)에 합격하여 선조 35년(1602)에 성균관 전적(成均館 典籍), 홍문관 부수찬(弘文館 副修撰), 홍문관 부교리(副校理)를 역임, 선조 36년(1603)에는 임진왜란 당시 소실된 실록 재간행 사업에 안간공파의 청천군 순익(菁川君 舜翼)과 대사헌공 경종(慶宗)이 함께 참여하였다. 선조 37년(1604)에 홍문관 교리와 부응교로 승직되고 문묘증수(文廟增修)에 기여한 功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加資)되었고, 선조 38년(1605) 승정원 동부승지로 임명, 선조 39년(1606)과 선조 40년(1607) 사이에는 좌부승지, 우승지, 좌승지를 역임하며 임금을 측근에서 보필했고 삼사(三司)의 하나인 사간원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선조 41년(1608) 2월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등극했는데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이 치열한 다툼을 벌였으며 明나라와도 책봉 문제로 미묘한 긴장을 빚고 있었다. 이 때 公은 사은 진주사(謝恩 進奏使)로 중대한 임무를 띠고 明나라에 다녀온 후 병조참의를 거친 뒤 광해군 8년(1616)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어 좌의정(左議政)인 월사 이정구(月沙 李廷龜)가 관복주청사(冠服奏請使)가 되고 公이 부사(副使)가 되어 明나라에 파견됐다. 사신(使臣)의 임무는 明의 황제(皇帝)에게 광해군의 모친인 공빈 김씨에게 관복(冠服)을 하사(下賜)해 줄 것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明에서 돌아온 뒤 광해군 10년(1618) 1월 대사헌에 재임명된 公에게 권신 이이첨(權臣 李爾瞻)은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비(廢妃)를 주장하면서 인목대비와 그 소생(所生)인 정명공주(貞明公主)를 처우할 조례(條例)를 만들어 재신들에게 동의를 구하였는데 공주의 늠료(급료)를 궁인(宮人)과 같이 하고 혼례(婚禮)를 사가(私家)와 같이 실시토록 한다는 대목에 이르자 “선왕(先王)의 골육(骨肉)을 평인(平人)으로 강등(降等)하려 하느냐”며 초안(草案)을 찢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로 인하여 이이첨은 극형을 주장하였으나 광해군 10년(1618) 2월 2품직인 대사헌에서 파직되어 3품직인 울산부사(蔚山府使)에 임명되어 사실상의 유배를 당하였다. 이런 와중에 광해군 12년(1620) 9월 명나라의 광종(光宗)이 궁중내분으로 폭사 당하자 광종의 죽음을 조문(弔問)하는 사신(使臣)을 보내게 되었는데 광해군은 公을 진향사(進香使)로 차송(借送)하라 하명하여 진향사의 임무를 띠고 요동지방을 지나자마자 당시 요동지방을 지배하고 있던 후금(後金: 淸나라의 前身)軍에 의해 1921년 귀국길이 막혀 사관(使館)에서 머문 지 6개월 만에 등주(登州)에서 배편으로 돌아오다가 향년 68세의 나이에 항해도중(航海途中) 배가 침몰되어 별세하셨다. 公의 귀국이 늦어지자 큰 아들 여항(汝恒)은 公을 모셔오고자 진위사(陣慰使)의 서장관(書狀官)을 자청하여 항해도중 별세한 사실을 알게 되었고 언제 어디서 타계했는지를 알 수 없어 승선(乘船)한 날자인 9월 9일을 기일(忌日)로 삼았으며 남긴 의관(衣冠)을 원주 부론면 갑좌(原州 副論面 甲坐) 언덕에 반장(返葬: 客死한 분을 고향으로 옮겨 장사지내는 것)하였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집권한 仁祖도 나라 위해 순직한 公의 고귀한 위덕(威德)을 기려야 한다며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追贈)하였으며 후(後)에 정민(貞愍)의 시호가 내려졌다. 시장(諡狀: 시호를 내릴 것을 청하기 위해 生前의 공적을 기록한 글)을 지은 이는 正祖 즉위년에 타계한 지중추부사 청헌공 남태제(淸獻公 南泰齊)이니 영조 52년(1776)에 시호가 내려졌음이 「후촌유고(後村遺稿)」에서 밝혀졌다. 公의 묘소는 충남 천안시 목천읍 삼성리 선영하(先塋下)에 모셔져 있다.

 

配位는 이조판서를 지낸 이기의 따님인 한산이씨(韓山李氏)이다.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 여항은 문과에 합격하여 승지를 지냈고 차남 여각 역시 문과에 합격하여 부사를 지냈다. 큰 사위는 현감(縣監)을 지낸 평산인 신경제(平山人 申景堤)이고 둘째 사위는 첨정(僉正)을 지낸 죽산인 안정섭(竹山人 安正燮)이다. 향년 68세의 굴곡 많았던 공의 빛나는 생애가 역사의 그늘에 묻혀 있음이 못내 아쉬웠으나 후촌유고부 문옹년보(後村遺稿附 文翁年譜)가 발견되어 다행스럽다.

 

참고문헌 :「선조실록」,「광해군일기」,「인조실록」,「호은집」,「시장」,「후촌유고부 문옹년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