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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성공 류 부(孝成公 柳 溥)

       (성종1년~중종30년, 1470~1544)        

 

 

公은 성종 1년(1470) 남원부사 류첨정과 직장 홍종의 따님 남양홍씨의 2남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장(蔣), 字는 언박(彦博)이다. 조부는 증영의정 상의원정공 양(贈領議政 尙衣院正公 壤), 증조는 증좌찬성 진천군 자해(子偕), 고조는 이판공 이(吏判公 怡)이다. 중종반정의 주역인 문성공순정(文成公 順汀)의 조카이며 중종조(中宗朝)에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청백리에 녹선된 충정공 빈(忠定公 濱)과 재종간이다. 公은 주계군 이심원(朱溪君 李深源: 효령대군의 손자)의 사위가 되어 그로부터 글을 배웠다. 公은 성종 23년(1492) 사마시에 합격, 진사가 되었고 연산군 7년(1501) 4월 식년(式年) 문과에 병과로 합격하여 연산군 8년(1502) 7월 홍문관 정자로 출사하였으나 연산군 10년(1504)에 일어난 갑자사화로 홍문관 박사로 있던 公은 연산군이 나이 든 신하들을 위해 베푼 연회에서 술을 엎지른 예조판서 이세좌(李世佐)의 죄를 논박하지 않았다 하여 은진(恩津)으로 유배를 갔다. 중종반정 이후 풀려난 公은 중종 4년(1509) 사헌부 헌납에 임명되었으며 경연(왕을 상대로 유교경전을 강의하고 정치문제도 논의하는 자리)에서 여러 차례 직간(直諫)한 것으로 실록은 전한다. 중종의 가정교사(家庭敎師)이면서 ’정치고문(政治顧問)‘ 역할을 했다.

 

중종 16년(1521) 명나라 세종의 등극을 축하하기 위한 진하사(進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을 다녀와 중종 19년(1524) 홍문관 직제학 겸 응교에 이어 중종 20년(1525)에는 승정원 동부승지, 좌부승지, 우승지를 역임했다. 중종 20년(1525) 12월 우승지로 있던 公은 재변(災變)과 도둑의 횡행에 대해 논의하는 경연에서 말만 앞세우고 행동이 따르지 않는 조정 관리와 도둑을 잡는다고 민폐를 끼치는 지방관들을 맹렬히 성토했다. 중종 21년(1526) 좌승지와 도승지를 역임하면서 흉년에 따른 대책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군정(軍政)상의 폐단을 바로잡아 병역과 농사를 충실히 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중종 22년(1527) 9월 전라도 관찰사로 있을 때 생원, 진사(生員, 進士)들을 함부로 권농관(勸農官)으로 동원했다 하여 대간(臺諫)으로부터 탄핵을 받고 물러나 있던 公은 첨지중추부사로서 성절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같은 해 11월 홍문관 부제학으로 임명 된지 불과 두 달이 못되어 정치 전반에 관한 폐단과 대책을 망라한 장문의 상소문을 올려 중종은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公은 무려 네 차례의 사직을 청한 끝에 홍문관 부제학에서 물러났다. 사임을 자청한 것은 公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상소가 간원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으로 중종이 직접 이를 만류하였으나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았다. 公의 상소들은 문장이 뛰어나고 사태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고 나름의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소문의 전형이었다. 중종 27년(1532) 지중추부사, 지의금부사를 거쳐 중종 28년(1533) 호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직무에 부적합하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아 물러난 뒤 公은 중종 28년(1533) 6월 공조판서에 임명되고 그해 12월에 병조판서, 중종 29년(1534) 2월에 다시 공조판서에, 4월에 우참찬에 임명되었다.

 

중종 30년(1535) 1월 우찬성에 승진하여 성균관동지사를 겸임하고 11월에는 좌찬성을 역임했다. 중종 32년(1537) 우의정에 오른 뒤 곧바로 좌의정에 임명되었으나 다시 대간의 탄핵을 받고 물러났다. 축출된 김안로의 후원을 받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반대파들조차도 公의 무색무취함을 지적하였을 뿐 자신의 자리를 위해 김안로와 가까웠던 것이 아님을 인정했다. 중종은 판중추부사로 임명하는 등 公에 대한 각별한 신임를 표하였고 중종 34년(1539) 70세가 되는 公에게 궤장(几杖)을 하사하였으며 기사(耆社) 즉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이후 판의금부사를 거쳐 중종 35년(1540) 영중추부사에 임명되어 중종 39년(1544) 8월 12일 76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묘소는 도봉구 도봉동 무소(무수)곡 선영에 모셔져 있다. 진주류씨 병인보에 효성의 시호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배위(配位)는 두 분인데 첫 배위는 주계군 이심원의 따님인 전주이씨이고 둘째 배위는 월성부수 이의의 따님인 전주이씨 이다. 둘째 배위도 첫 배위와 마찬가지로 역시 종실(宗室)이며 公이 첫 배위와 사별한 후인 64세에 맞아들였다. 아들 사상(師尙)은 음서(蔭敍)로 사헌부 감찰을 지냈다.

 

참고문헌 : 「중종실록」, 「국조방목」, 「연려실기술」, 「해동휘어」, 「석담일기」, 「진주류씨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