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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정공 류 빈(忠定公 柳 濱)

       (? ~ 중종4년, ? ~ 1509)        

 

 

公은 증좌찬성 행우양위 선전관 류인습(贈左贊成 行龍驤衛 宣傳官 柳仁濕)과 참봉 이효복(參奉 李孝福)의 따님인 협천이씨(陜川李氏)의 3남 중 둘째로 태어났으나 生年은 미상이며 字는 자청(子淸)이다. 조부는 증호조참판 첨지공 균(僉知公 均), 증조는 증좌찬성 부지돈령부사 진천군 자해(晉川君 子偕), 高祖는 이판공 이(吏判公 怡)이다. 중종반정(中宗反正)을 일으킨 삼대신(三大臣) 중의 한 사람인 문성공 순정(文成公 順汀)이 당숙(堂叔)이며 中宗朝에 좌의정을 지낸 효성공 부(孝成公 溥)가 재종(再從)間이다. 公은 문무겸전(文武兼全)한 문성공 못지않게 활쏘기의 달인이었고 중종반정을 독자적으로 도모하였으며 언관(言官)으로서 강직했고 인사를 처리함에 있어 공평무사했다. 부자(父子) 청백리인 6대조(六代祖) 정평공 구(靖平公 玽)와 5대조(五代祖) 청백리공겸(淸白吏公 謙)에 이어 사후(死後) 청백리(淸白吏)로 녹선되었다.

 

公은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성종 14년(1483) 3월 29일 식년문과 춘당대시(春塘臺試)에서 丙科에 합격하여 성종 20년(1489) 선교랑 정언(正言)에, 성종 21년(1490)에 사간원 정언이 되었는데 이때부터 직언을 서슴치 않는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다. 선교랑 정언 시절 성종의 친형이 되는 월산대군(月山大君)의 묘지 조성에 있어 주변의 다른 묘소를 이장시키려 하자 이에 이의를 제기했다. 또한 사간원 정언 시절인 성종 22년(1491) 성종이 상소를 배후에서 사주한 죄를 물어 오랫동안 기피인물로 등용하지 않았던 임사홍을 관압사(管押使)로 북경에 파견하려 하자 소인(小人)이라며 탄핵 상소를 올렸다. 성종 25년(1494)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어 世子의 공부가 부실하다며 시강관(侍講官)을 자주 교체하지 않도록 주청(奏請)하였고 연산군 2년(1496) 사헌부 집의가 된 公은 폐비 윤씨 묘에 신주를 모시고 사당을 세우려하자 성종의 유교(遺敎)를 내세워 반대했고 연산군 4년 무오년(1498) 2월에 홍문관 부제학이 되어 동년 4월 억지로 불우(佛宇: 부처를 모시는 대청)를 영건(營建=建築)하심은 선왕(先王)의 뜻이 아니라는 등 직언을 서슴지 않아 연산군과 곳곳에서 부딪쳤다. 연산군 10년(1504) 형조참판으로 승진한지 불과 21일 만에 함경도 관찰사에 임명된 公은 갑자사화(甲子士禍)를 맞게 되는데 임지(任地)로 떠나기 전 궁중의 일을 누설했다는 엉뚱한 죄목으로 장형(杖刑)을 받고 호남으로 유배되었다. 갑자사화 이후 연산군의 폭정(暴政)과 난정(亂政)이 심화되자 유배지에서 이과(李顆), 김준손(金駿孫) 등과 연산군을 몰아내고 연산군 12년(1506) 6월 그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 즉 중종을 옹립하려는 거사의 격문을 만들어 조정대신에게 전달하였는데 연산군의 폭정을 일일이 열거한 후 진성대군 추대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이른바 ‘혁명공약서(革命公約書)’ 이었던 것이다. 중종반정 성공 후 다음해(1507) 윤 정월(閏 正月) 병조판서에 임명된 公에게 중종은 정국공신 4등(靖國功臣 四等)에 추록할 것을 지시하였으나 反正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으므로 공신책록(功臣策錄)을 극구 사양 하여 정국원종훈 1등(靖國原從勳 一等)에 책록되었다. 중종 1년(1507) 9월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지병이 깊어져 중종 2년(1508) 2월 지중추부사로, 5월에는 경기도 관찰사로 부임 동년 11월 초 公은 백성들의 어려운 사정을 감안하여 세금 감면과 군대 훈련장 터에서 경작을 계속할 수 있도록 주청했다.

 

公은 중종 3년(1509) 2월에 任地에서 타계했다. 실록에서 公의 졸기는 ‘류빈은 천성이 청렴결백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가사를 돌보지 않아 항상 거친 베로 이불을 만들어 덮었으며 이조판서로 재직 중 주요 결정을 주도하였지만 公의 집을 사사로이 찾아오는 사람이 없음으로 사림(士林)들이 높이 평가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사후 충정공(忠定公)의 시호(諡號)가 내려졌으며 중종 9년(1514) 12월에 좌의정 정광필의 주청에 의하여 淸白吏에 녹선되었다. 당시 함께 청백리로 정창손, 구치관, 김종직 등이 추천되었으나 정창손, 김종직은 중종조 청백리로 구치관은 성종조의 청백리로 녹훈되었다.

 

배위(配位)는 두 분인데 첫 배위는 현감 이인행(李仁行)의 따님인 연안이씨(延安李氏)이고 후배위(後配位)는 부윤 윤해(府尹 尹垓)의 따님인 파평윤씨이다. 아들 용근(庸謹)은 중종 11년(1516) 대과에 합격한 문무겸전의 인물로 함경도 병마절도사와 승지를 지냈다. 그러나 기묘사화에서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지목되어 화를 입고 삭직 유배되었으며 1528년 배소에서 고향으로 돌아오던 중 타계했다. 따님 세분은 부정(副正) 진주인 이징(李澄), 선전관 고성인 이윤(李潤), 판교 하양인 허지(許遲)에게 출가했다. 묘소는 실전(失傳)되어 후손들이 2005년 5월 충남 당진군 순성면 중방리 선영에 아들 북병사공 용근과 함께 설단(設壇)하여 향화를 올리고 있다.

 

참고문헌 :「성종실록」,「연산군일기」,「중종실록」,「국조방목」,「동각잡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