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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평공 류 구(靖平公 柳玽)

       (충숙왕 복위4년~태조7년, 1335~1398)        

 

 

공(公)은 고려 27대 충숙왕 복위 4년(1335)에 호양공 류혜방(胡襄公 柳惠芳)과 화원군 권중달(花原君 權仲達)의 따님인 안동 권씨의 3남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진주류씨의 중시조(中始祖)인 판시사공 인비(判寺事公 仁庇)의 曾孫이고 진주백 유(晉州伯 洧)의 孫子이다. 號는 조은(釣隱), 어촌(漁村)이며 시호(諡號)는 정평(靖平), 봉호(封號)는 진천군(晉川君)이다.

 

公은 25세 때인 공민왕 9년(1360)에 국가 최고시험인 대과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한 정몽주(鄭夢周), 이존오(李存吾), 문익점(文益漸), 임박(林樸) 등과 함께 합격하였다. 밖으로는 중국 元明 교체의 기운(氣運)이 감돌았고, 홍건적의 침범과 왜구(倭寇)들은 서남해 일대와 왕도(王都) 개성부근까지 쳐들어오고 있는 가운데 국정마저 권력 암투와 부정부패로 고려의 국운은 풍전등화(風前燈火) 지경이었다. 이처럼 어려운 시기에 公은 감찰어사(監察御使)로 관직을 시작하였는데 다음해인 공민왕 10년(1361) 10월에 홍건적(紅巾賊) 10만 대군이 두 번째로 압록강을 건너 개경을 침공하자 왕실과 조정신료들은 南으로 피난하였다. 그해 12월 안동에 도착한 조정은 정세운, 안우, 김득배, 이방실 등의 대반격으로 다음해에 홍건적의 난(紅巾賊의 亂)을 완전 격퇴하였으나 조정의 중신이었던 중서문하시랑 평장사(中書門下侍郞 平章事) 김용은 정세운, 안우의 높은 공적을 시기한 나머지 이들을 제거하고 왕권찬탈의 야심으로 공민왕이 개경근교의 국찰(國刹) 흥왕사에 머무르고 있을 때 자신의 일당으로 하여금 흥왕사를 습격하여 왕을 시해(弑害)코자 하였으나 실패했다. 이것이 공민왕 11년(1362)에 일어난 ‘흥왕사의 변란(興王寺의 變亂)’이다.

 

公은 이즈음 도관정랑(圖錧正郞)으로 홍건적 격퇴와 반역배 일당을 물리쳐 개경을 수복하는데 큰 공을 세워 공민왕 12년(1363)에 최영, 변안열, 이인임 등과 함께 개경(개성)수복 2등 공신에 올랐다. 공민왕 23년(1373)과 24년에는 우사의대부와 좌사의대부를 역임, 부정부패의 환관(宦官)들을 상소하여 관기숙정에 앞장섰고 우왕 6년(1380)에는 한양병마사(漢陽兵馬使) 겸 한양윤(漢陽尹)으로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군사적 요충지인 한양의 축성을 건의하였으며 그 후 개성윤, 밀직사, 정당문학(開城尹, 密直司, 政堂文學) 등 중책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우왕 14년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葳化島 回軍)’으로 국권이 이성계일파에 의하여 좌우되었다. 우왕과 창왕을 폐가입진(廢假立眞: 가짜왕을 폐하고 진실된 왕을 세운다)이라는 명분으로 폐위시켰다. 이러한 혼란 속에 공양왕 1년(1389) 정몽주의 후임으로 예문관 대제학이 되고 동왕 2년에는 양광도 도관찰사(陽廣道 都觀察使)로 제수되었으며 그해에 다시 예문관 대제학(藝文館 大提學)에 재임용되었다.

 

마침내 이성계는 공양왕 4년(1392) 475년의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동년 7월 28일에 조선조 개국(朝鮮朝 開國)을 선언한 이성계는 公을 전주를 완산부로 승격시켜 부윤(府尹)으로 임명하였다. 태조 3년(1394) 8월 정당문학 태학사(政堂文學 太學士)에 승진되고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추서되었으며 다음해 10월에 정조진표사(正朝進表使)로 明나라 남경으로 떠났는데 그 다음해(1395) 2월에 뜻하지 않은 표전문(表箋文: 서간형식의 외교문서)내용이 명나라를 경멸ㆍ모욕했다는 이유로 우리 사절 일행을 감금하고 표전문 작성에 깊이 간여한 정도전(鄭道傳)이 직접 와서 해명하라는 주원장(朱元璋)의 요구에도 이에 불응하자 한성윤 정총을 억류 끝에 참수하는 등 강경하였으나 태조 7년 명나라 황제 주원장이 죽고 동년 9월에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이 피살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公은 이러한 와중에서 명나라에 억류 된지 만 13개월간 온갖 수모와 고초를 겪은 끝에 다음해 11월 6일에 쇠약한 몸으로 귀국한 후 국가원로로서 삼사우복야(三司右僕射)로 있던 중 태조 7년(1398) 1월 15일 64세를 一期로 타계하여 생전의 높은 공적을 기려 정평(靖平)의 시호를 내렸다. 조선조 실록에 따르면 公은 타고난 성품이 부지런하고 검소하여 겉치레가 없었다[근검절약불무, 외식 / 勤儉節約不務, 外飾]. 목은 이색(牧隱 李穡)은 公의 인격과 성품을 평하여 이르기를 벽오동(碧梧桐)과 같다 하였다. 第4代 世宗 때에 이르러 公의 이러한 행적을 높이 평가하여 태좆 청백리(太祖朝 淸白吏)로 추서 녹훈하였다.

 

配位 李氏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겸(謙)은 조선조(朝鮮朝)에서 예문관 직제학을 지냈으며 세종조 청백리(世宗朝 淸白吏)에 녹선 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행신동 세장지(世葬地: 고양시 향토문화재 지정 제30호)에 모셔져 있다.

참고문헌 :「고려사」,「태조실록」,「목은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