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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교자 류항검과 세계 유일 동정부부

        (殉敎者 柳恒儉과 世界 唯一 童貞夫婦)

         류항검(영조32년~순조1년, 1756년~1801년)

 

치명자산 성지

[순교자인 류항검 아우구스티노와 그의 부인 신희, 둘째 아들 류문석 요한과 조카 류중성 마테오, 제수 이육희 그리고 동정부부 류중철 요한과 이순이 루갈다 등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류항검의 생가 파가저택

[국사범(반역죄)에게 내려지는 죄목으로 집은 불사르고 집터는 웅덩이로 만들어 3대를 멸하는 조선왕조 500년사에서 가장 큰 형벌로써 이조실록에서 근거를 찾아 이곳이 류항검의 생가 터임을 확인하다.(처형 1801년/현지확인 1985년)]

 

동정부부

(동정부부라함은 결혼한 부부가 한번도 성적관계를 하지 않고 순결을 지킨 부부를 일컫는데 18세기 말 천주교가 박해를 받던 시절 박해를 피하기 위한 형식적인 결혼으로 류중철 요한과 이순이 루갈다의 혼인을 두고 동정부부라 한다.)

공은 영조30년(1754) 류동근(柳東根)과 권기징(權沂徵)의 따님인 안동권씨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조부는 갑춘(甲春), 증조는 창진(昌辰), 고조는 수억(壽億)이다. 부친 동근의 생부는 재춘(再春)으로 재종숙인 갑춘에게 출계했다. 조부 갑춘 또한 양자로 생부는 광진(光辰)이다. 증조 창진은 수만(壽萬)에게서 태어나 숙부인 수억의 계자가 되었다. 진주류씨 중시조 진산군 휘 인비(諱仁庇)의 후손인 소재공 순선(素齋公 順善)이 8대조가 된다. 공의 외조부 권기징은 조선 초 대학자인 양촌 권근(陽村 權近)의 후손이다. 공의 선대 묘소는 경기도 양평에 모셔져 있는데 반해 증조부 이래 직계 선대의 묘는 전주 일대에 모셔져 있는 것으로 보아 증조 때부터 전주로 내려 온 것으로 보이며 남인가문과 연결되어 세거지를 호남으로 옮긴 것으로 추정되며 상당한 재산을 축적하여 내 노라 하는 부호가 되었다.

 

공은 31세가 되던 정조 8년(1784)에 서학교리연구회를 만들어 천주교 교리를 연구하고 있던 권철신(權哲身, 1736~1801)이 동생 권일신(權日身)과 함께 북경에서 영세를 받고 돌아온 이승훈(李承薰)에 의해 입교한 권일신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듣고 그를 대부(代父)로 삼아 천주교에 입교하여 이승훈으로부터 ‘아우구스티노’ 라는 세례명(洗禮名)을 받았으며 권일신은 조선 초기 천주교 교회의 창설을 주도한 3인 중의 한사람이다. 공은 입교를 계기로 호남지방 천주교 교회의 초석이 되었고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에 의해 신부의 권한을 위임받고 고향인 전주 초남리(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게리)에 내려와 호남지역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파했으나 가성직제도가 교리에 어긋나며 독성죄(瀆聖罪)가 됨을 깨닫고 이를 시정키 위해 북경 주교에게 문의 편지를 내게 했으며 주문모 신부를 입국시키는 데에도 큰 공을 세웠다. 정조 15년(1791) 전라도 진산(珍山: 현 충청도 錦山)의 천주교 신자인 윤지충(尹持忠, 1759~1791) 권상연(權尙然, 1750~1791)은 윤지충 모친 안동권씨의 상을 당하자 천주교 교리에 따라 제사를 지내지 않고 신주를 불태웠다. 윤지충은 공의 이종사촌 동생이고 권상연은 외종사촌 형이다. 조정에서는 두 사람을 충효의 도덕을 문란케 한 자라 하여 처형하였고 정조가 타계(1800)하고 순조가 즉위하자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1801년 대왕대비의 교서로 사교(邪敎) 박해령을 선포, 전국의 천주교 교도를 수색하여 300여명의 신도가 처형되었는데 이를 ‘진산사건 혹은 신유박해(辛酉迫害)’라고 부른다.

 

정조 22년(1798) 전주 초남리 공의 집안에서는 한국천주교 역사에 있어 가장 아름답고 신앙적인 행사가 이루어졌는데 아들 중철과 며느리 이순이(李順伊 : 조선의 세 번째 왕 태종의 아들 경령군의 후손인 이윤하(李潤夏)와 안동권씨의 따님)와 동정결혼식(童貞結婚式)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들 부부는 부모 앞에서 동정서원, 형식은 부부이지만 실제로는 오누이처럼 살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상황에서 양반집 규수가 시집을 가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신앙에 의해 동정을 지키면서 살기로 다짐하면서 자신들의 삶을 행복하게 살았다지만 류중철은 동정서약을 어길 마음이 생길 때마다 이순이와 함께 기도와 묵상으로 극복하면서 순교의 길을 가기로 마음먹었다.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체포되어 스물두 살에 교수형(絞首刑)에 처해졌다. 순교한 뒤 그의 옷에서 ‘누이여,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 라고 이순이에게 쓴 편지가 발견되었다.

이순이는 1801년 순교한 이경도와 1804년 순교한 이경언은 그녀와 남매지간이다. 천주교라는 새로운 종교와 사상의 세례를 받은 이순이는 10대(代)의 나이에 세상의 삶에 연연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이순이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어머니와 언니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차분하고 담담하게 겪은 일을 전하고 자신의 죽음을 슬퍼할 친정 식구들을 위로했다. ‘순교를 하게 되면 그 기이함을 어느 순교와 비교할 수 있겠어요. 다른 성인들이야 응당 할 일을 하신 것이겠지만, 감히 우러러나 볼 순교를 이 보잘 것 없는 생명에게 허락하시면 그런 황송한 일이 어디 있겠어요. 그러나 내 죽은 것을 산 것으로 아시고 산 것을 죽은 줄로 아시며 나를 잃은 것을 슬퍼하지 마세요.’ 라 했다.

‘전주의 땅 대감’ 으로 불리던 류항검의 장남으로 태어난 류중철이 16세가 되던 1795년 주문모 신부가 마을을 방문했을 때 ‘동정생활을 하겠다.’ 는 결심을 밝히고 2년 뒤 한양에 살던 이순이와 동정을 지키게 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주문모 신부가 두 사람의 혼인을 주선하여 여자가 혼인을 하지 않고 살기가 어려웠던 당시 조선사회에서 그녀는 동정생활을 결심한 류중철과 배필(配匹)이 되었다. 아버지 류항검은 1801년 신유박해가 터지자 전라도 지방에서 제일 먼저 체포돼 서울로 압송된 공은 대역부도(大逆不道) 죄로 능지처참형(陵遲處斬刑)을 받고 전주 감영으로 다시 이송되어 지금의 전동성당 터에서 1801년 10월 24일 46세의 나이로 참수되었고 동생 류관검에 이어 11월 14일 두 아들 류중철과 류문석, 그리고 다음해 1월 31일 부인 신희와 며느리 이순이(20세), 조카 류중성(18세)과 제수 이육희(35~40세)가 순교했다. 족보에는 신유년에 사학으로 극형에 처해졌다[辛酉以邪學伏法]고 했다. 공의 일가는 지상의 모든 삶을 영생의 세계로 옮겼고, 이들의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믿음의 확신은 일가의 단종을 가져왔다. 조정은 이들의 흔적을 아예 없애기 위해 대역죄인의 집을 헐고 집터를 깊게 파서 연못을 만들어 버리는 ‘파가저택(破家瀦宅)’의 형을 내렸으며 남아 있는 노비와 인척들은 그들의 시신을 거두어 초남리 너머에 있는 재남리 바우배기에 합장하였다.

 

1914년 4월 19일 7인의 순교자 유해를 작은 항아리에 각각 담아 ‘치명자산’에 이들 일곱 순교자들의 유해를 안장하였다. 치명자(致命者)라는 용어는 순교자(殉敎者)라는 뜻으로 자기가 믿는 종교 즉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아 목숨을 잃은 사람을 의미하는데 ‘치명자’가 훨씬 비종교적인 어휘인데도 가톨릭에서는 이를 즐겨 쓰고 일반에서는 오히려 종교적인 용어인 ‘순교자’로 잘 통한다. 결국 ‘치명자산 성지’는 1801년에 순교한 류항검의 가족들을 합장한 묘소가 있는 곳으로 순교자들의 산이라는 의미로 쓰이며 동정부부 이 루갈다를 추앙하는 사람들은 ‘루갈다 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치명자산 류항검 일가 합장묘에는 호남의 첫 사도요, 순교자였던 류항검 아우구스티노와 그의 부인 신희(申喜), 둘째아들 류문석(柳文碩) 요한과 조카 류중성(柳重誠)마테오, 제수 이육희(李六喜) 그리고 동정부부로 유명한 류중철(柳重哲) 요한과 이순이(李順伊) 루갈다 등 7인의 순교자 유해가 모셔져 있다.

지방기념물 제68호로 지정된 순교자 묘 바로 밑에는 1994년 5월 9일 건립된 기념성당인 전동성당이 있다.

거제도에서 발견된 류항검의 딸 류섬이의 묘비

('류처자묘' 라고 쓰여 있다)

류항검의 딸 류섬이의 무덤이 경남 거제시 거제면 내간리 인근에서 발견되어 류항검과 그의 자제들이 '전라도의 사도'로서 신앙을 지키고 전파한 사실이 보다 분명해지게 됐다.['전라도의 사도' 근거입증, 가톨릭신문 2014년5월25일 발행 제2896호 3면]

 

류섬이는 아버지 류항검이 신유박해 때 전주 남문 밖에서 순교하면서 당시 대명률의 연좌제에 따라 9살에 거제부 관비로 유배되었다.

 

한편 2014년 8월 14일부터 2014년 8월 18일까지의 일정으로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청 교황은 2014년 8월 16일 10시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개최한 한국 순교자 124위 시복식에서 우리 진주류씨 가문의 류항검 아우구스티노(1756년 전주생, 1801년 10월 24일 능지처참형), 장남 류중철 요한(1779년 전주생, 1801년 11월 14일 교수형)과 며느리 이순이 루갈다(1782년 서울생, 1802년 1월 31일 참수형), 차남 류문석 요한(1784년 전주생, 1801년 11월 14일 교수형), 조카 류중성 마테오(1784년? 전주생, 1802년1월 31일 참수형) 등 5인의 순교자에게 시복되었다.

 

시복(諡福)이라 함은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시성(諡聖)과정의 한 단계로서 가톨릭 신앙 안에서 죽은 사람이 공적인 존경을 받고 복자품(福者品)에 올리어 복자(福者/Beatus; 準聖人 지위의 사람) 또는 복녀(Beata)라는 칭호로 불리는 것을 교회가 교황의 권위 아래서 인정하는 공식행위이다.

 

시복식 광경

프란치스코 교황의 시복선언

 

참고문헌 :「진주류씨 인물전 및 임진보」「초남리에서 치명산까지(천주교 전주교구 홍보국)」「새전북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