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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사공 류자공과 여주이씨밀양입향시거지

             (進士公 柳子恭과 驪州李氏密陽入鄕始居地)

 

5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외손봉사(外孫奉祀)를 받고 계신 진사공 류 자공 지묘(進士公 柳子恭 之墓)

 

이곳은 여주이씨의 밀양 입향 시거지로서 당초의 마을 이름은 사인당리(舍人堂里)라 하였다. 조선조 초기에 진사 진주류공 자공(進士 晉州柳公 子恭)이 처음 이 마을에 정착하여 부윤(富潤)한 전장(田莊)을 일구었으나 서기 1500년경 연산조(燕山朝)의 난정(亂政)을 피해 낙남(落南)을 한 사위 충순위공 휘 사필(忠順衛公 諱 師弼)에게 그 터전을 물려주었다. 충순위공은 여말선초(麗末鮮初)이래 개경(開京)과 한양(漢陽)의 명문화벌(名門華閥)의 자손으로 문절공 기우자선생 휘 행(文節公 騎牛子先生 諱 行)의 현손이고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외손자인 중화공 휘 증석(中和公 諱 曾碩)의 셋째 아드님이다. 슬하에 진사공 휘 원(進士公 諱 遠)과 한림 월연공 휘 태(翰林 月淵公 諱 迨) 형제를 두었고 그 아랫대에 생원공 휘 광로(生員公 諱 光輅)와 승지 금시당공 휘 광진(承旨 今是堂公 諱 光軫) 및 제헌공 휘 원량(霽軒公 諱 元亮)과 증참의공 휘 원충(贈參議公 諱 元忠) 등 네 분 친손의 후예들이 각기 분파가 되어 경향 각처에서 번성하게 가문을 빛내고 있다. 비록 500년이 넘는 긴 세월에 고장의 옛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지만 아직도 본래의 제택(第宅)자리에는 춘우정(春雨亭), 영사재(永思齋), 종택(宗宅) 등이 새롭게 단장되어 남아있고 추화산(推火山) 자락에는 울연(鬱然)한 송추(松楸)속에 누대 선영(累代 先塋)이 내려다보고 계시는 유서(由緖) 깊은 고적지(古蹟地)이다.

 

[서기 2006년 병술(丙戌) 8월  일.  여주이씨 밀양파 대종회(驪洲李氏 密陽派 大宗會)에서 세우다.]

여주이씨 밀양파의 내력을 밝히는 “驪州李氏 密陽 入鄕 始居地 記念碑”의 비문(碑文)이다.

 

이 마을은 여주이씨가 입촌하기 전까지는 진주류씨의 터전으로 당시의 주인은 진사공 류자공(進士公 柳子恭)인데 류공(柳公)은 곧 충순위공 이사필(忠順衛公 李師弼)의 장인이 되신다. 본래 한양의 명문거족이었으나 일찍이 이곳으로 낙향하여 주변 수십리에 이르는 지역에 광활한 산택(山澤)과 전토(田土)를 소유함으로써 거만의 장자(長者)가 되었다. 다만 슬하에 아드님이 없고 충순위공의 배위가 되신 무남독녀의 따님 한분을 두어 그 생활의 터전과 자산을 모두 사위에게 물려주게 되었는데 그것이 사인당리의 여주이씨 세거지가 된 동기와 내력이라 할 수 있다. 류공의 고조인 호양공 류혜방(胡襄公 柳惠芳)은 지영광군사(知靈光郡事)를, 증조인 정평공 류구(靖平公 柳玽)는 대제학으로서 청백리에 추록되었고 진천군(晉川君)으로 봉해졌으며 조부인 청백리공 류겸(淸白吏公 柳謙)은 보문각 직제학, 청백리에 추서되었고 충주최씨와 4남(이(怡), 열(悅), 척(惕), 전(恮)) 3녀를 두셨는데 부친 판사공 류전(判事公 柳恮)은 막내로 태어나 판사를 지내셨으나 묘소는 실전되었다.

 

사인당(舍人堂)이라는  마을 이름을 밀양읍지에서 ‘사인당리는 대대로 전해오기를 여덟 사인(八舍人)이 이곳에서 났으므로 이름이 생겼다.[舍人堂里世傳八舍人生于此故名]’ 라고 유래를 밝힌 다음 ‘진사 류자공(進士 柳子恭), 진사 이원(進士 李遠), 한림 이태(翰林 李迨), 진사 이원량(進士 李元亮), 생원 이광로(生員 李光輅), 승지 이광진(承旨 李光軫), 생원 이경홍(生員 李慶弘), 진사 이경승(進士 李慶承)이 살았다.’ 라고 부연하고 있다. 이는 곧 8인의 생원과 진사가 4대에 걸쳐 같은 당내(堂內)에서 배출되어 거주한 “선비의 집(舍人堂)”이란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듯하며 밀양대성(密陽大姓)의 근원지가 되었다. 따라서 ‘사인당리’는 조선조 초기 선세(先世)의 여덟 분 생원, 진사의 태생과 거주로 인해 생긴 지명으로서 여주이씨의 상재지향(桑榟之鄕)이라 할 것이다. 류공의 사위 이사필은 부친인 중화공 이증석(中和公 李曾碩)의 장자 이사준(長子 李師準)과 차자 이사연(次子 李師衍)이 무후(无后)가 됨으로써 형이 없으면 아우가 그 부조(父祖)의 가계(家系)를 계승하는 이른바 형망제급(兄亡弟及)의 관습에 따라 제3자인 이사필(李師弼)의 후손이 자연적으로 승종(承宗)하게 되어 종가(宗家)가 되었는데 자는 여량(汝良)이고 성종(成宗) 때 유음자제(有蔭子弟)로 충순위에 입속(入屬)하여 교위(校尉)의 관록을 받았으며 연산군의 난정(亂政)을 보고 처가향(妻家鄕)인 밀양으로 내려와 그곳 사인당리에 터전을 잡아 여주이씨 밀양파(驪州李氏 密陽派)의 입향조(入鄕祖)가 되었으며 춘우정은 처음 제택이 있던 자리에 충순위공과 큰 아들 진사공 휘 원(遠) 양 대의 유덕을 추모하고 그 전거(奠居)를 영구히 기념하기 위해 후손들이 대종실(大宗室)로 삼고 있으며 영사재는 입향조께서 집을 지을 때 교육을 위해 세운 건물이다.

 

처음 밀양으로 입향(入鄕)하신 충순위공 휘 사필과 공인 진주류씨(恭人 晉州柳氏)의 쌍분묘(雙墳墓)를 最尊位로 하여 묘역 위쪽에는 충순위공의 장인이신 진사공 휘 자공(進士公 諱 子恭)과 그 배위인 밀양박씨(密陽朴氏)의 묘소도 봉안되어 있다. 이는 충순위공의 유명(遺命)에 따른 것으로 직계 자손이 없는 외 선조(外 先祖)의 향사(享祀)와 묘소 관리를 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외 후손(外 後孫)들이 정성껏 받들어 오고 있다.

참고문헌 : 사인당리의 옛 가문(여주이씨 밀양파 대종중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