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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헌국회의원 류래한(制憲國會議員 柳來漢, 1888~1956)

 

제헌국회개원기념 국회의원 사진(制憲國會開院記念 國會議員 寫眞)

 

입법의원 류래한은 성균관 박사, 법관양성소 교관 류태영(柳台永)과 전주이씨 사이에 3남 2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래완(來琬), 호는 이운(怡雲)이다. 조부는 협린(協麟), 증조는 봉열대부 장령 성하(奉列大夫 掌令 聖河), 문성공 순정(文成公 順汀)이 15대조이며, 이판공 이(吏判公 怡)의 18대손이다. 류태영은 구한말 법관양성소 박사로서 정치, 경제, 문화 등 실학에도 깊은 조예가 있으셨으며 대표적 문집인 몽벽루집(夢碧樓集 五卷)의 저서(著書)를 남기셨고 당대의 대학자 정인보(大學者 鄭寅普)와의 교류가 돈독했다. 선생은 유년시절 부친으로부터 한학(漢學)과 실학(實學)을 사숙(私塾)하면서 민족사상과 투철한 진충보국 정신, 멸사봉공의 국가관을 교육받았다.

세계의 대세(大勢)와 국내 정세, 그리고 식민지를 팽창시켜 나가는 일본을 보고 그들을 알아야 그들을 극복할 수 있다는 일념으로 일본 조도전대학(早槄田大學)에서 수학하고 돌아와 한일 합방의 부당함은 물론 그들의 학정(虐政)과 수탈(收奪)에서 벗어나 독립국가로서 자주권을 되찾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애국사상을 고취시켜야 함으로 종남(終南)ㆍ양서학당(養西學堂) 등에서 교편을 잡고 후진을 양성에 힘썼다.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고종황제가 끝내 훙서(薨逝)하시기에 이르자 기미년(己未年) 3월 3일 인산(因山: 황제의 장례)일에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한다고 흘려놓고 왜놈들의 방해공작을 대비하여 3월 1일로 앞당겨 대한민국의 독립을 선언과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하기로 한 민족대표들과 긴밀한 관계설정을 통해 선생은 우선 거사 당일 많은 군중 집결을 위한 유인물을 제작하여 단원들로 하여금 비밀리에 살포하고, 집회 질서유지와 방해세력인 일본 군경에 대한 파괴공작까지를 불사해 독립과 영토보존에 기여한다는 대의(大義)에서 비밀결사대인 보성단(普成團)을 조직ㆍ주도하여 활동하다가 3년간 옥고를 치룬 항일 구국의 우국지사였으며 출감 후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위한 사상계몽, 후학양성 등 비밀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일제치하(日帝治下)에서의 독립운동과 계몽운동에 헌신한 업적, 학식과 덕망을 인정받아 혼란기의 질서회복과 치안유지를 위해 양평면장에 추대되었고 1946년 12월 양평, 여주, 이천, 용인, 광주지구 5개 군 대표로서 미군정의 승인 하에 치러진 과도정부 민선입법의원에 당선되어 신생조국의 건국준비에 초석으로서 활동하던 중 남한(南韓)만의 단독정부수립을 위하여 1948년 5월 10일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군민(郡民)의 압도적 지지로 다시 대한민국 제헌(制憲)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민족중흥을 이룩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6ㆍ25 전후 복구를 위해 불요불급한 재정은 한 푼이라도 절약하여 국가 재건에 써야 된다는 원칙주의자였으며 청백하고 강직한 성품은 후세에도 길이 본받아야 할 정신이다. 개원 첫날 국회의원 전용 고급 담배를 제공하자 많은 백성들이 굶주림에 허덕이고 국가의 재정이 어려운 때에 한 푼이라도 아끼지 않고 사치를 부리느냐, 백성이 있어야 의원도 관료도 있지 않느냐. 장수연(저질담배)을 가져오라며 호통을 친 일화(逸話)가 있다.

 

국가적인 준비도 없이 정쟁(政爭)으로 얼룩진 나날에서 남북이 갈리는 동족상잔(同族相殘)의 6ㆍ25(한국동란)가 발발(勃發)하여 3년 1개월의 전쟁 참화(慘禍)로 국가재산과 시설, 인명 피해는 이루 형언(形言)할 수 없었으므로 국가와 민족에게 마지막 봉사의 길을 찾던 중 미래에 대한 대비가 없이는 국가의 앞날도 없다는 것을 통감하고 이 나라 역군으로 키워야 할 전쟁고아들을 모아서 이들을 돌보며 사회사업과 구국정신 활동에 전념하다가 1956년 향년 68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했던 생을 마감하였다.

 

선생은 한 평생을 충성충효(忠誠忠孝), 인의예지(仁義禮智), 후예양성(後裔養成)을 실천 덕목(德目)으로 삼고 이를 바탕으로 한 후손들을 훈육하고 몸소 실천하면서 많은 저서와 유고(遺稿)를 남겼으나 혼란기에 유실(流失)되어 왕촌록 문집6권(王寸錄文集六卷), 수견록 문집15권(隨見錄文集十五卷)만이 남아 있으며 다수의 시문(詩文)과 잡기(雜記) 등은 장손 기수(基秀)의 노력으로 한국학중앙연구원에 기탁하였다.

 

정부는 생전에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몸 바쳐 큰 발자국을 남기신 선생의 위대한 업적을 높이 평가하여 국민훈장 무궁화장(國民勳章 無窮花章)을 추서하고 후대에 귀감으로 삼게 하였다.

 

배위 남양 홍묘희(洪妙喜) 여사와의 슬하에 4남(홍섭, 준섭, 붕섭, 광섭)을 두었으며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산 606-1번지 모란묘원 가족묘지구 101호에 모셔졌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양평의향지」「진주류씨 임진보」

 

국민훈장 무궁화장 증서(國民勳章 無窮花章 證書)와 훈장(勳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