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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천공 류한규와 여성선비 사주당 이씨(師朱堂 李氏)

       - 1739~1821

 

태교신기(胎敎新記)

 

태교신기 언해본(諺解本: 한문을 한글로 풀이한 책)

 

사주당 이씨는 영조 15년(1739) 12월 5일 유시(酉時: 오후 5시~7시) 청주에서 전주이씨 노론가문(老論家門)인 통덕랑 이창식(李昌植)의 2남 5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집은 넉넉하지 않았지만 7대조가 증이조판서, 고조(이천배)가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의 막내동서가 된다. 어려서 길쌈과 바느질을 잘했으며「주자가례」「소학언해」「여사서」를 읽기 시작한지 1년 뒤에는「논어」「맹자」「중용」「대학」「시경」「서경」으로 나아가는 것을 오빠가 배우지 말라고 하자 아버지가 ‘그러지 마라. 옛 성현의 어머니 중에 누가 글을 몰랐는가.’ 했고 열다섯 전에 이씨 문중 남자를 앞섰다는 말을 들었다. 19세에 아버지 상(喪)을 당해 3년 상중(喪中) 솜옷을 입지 않았다. 이후 25세까지 “내훈” 이나 “여범“ 같은 여훈서(女訓書)를 편찬하고 유학 경전 자체를 체계적으로 연찬했다고「사주당 이씨의 삶과 학문」에서 고려대 한문학과 심호경 교수는 밝히고 있다. 또한 영조(英祖)의 경연관(經筵官) 송명흠이 사주당에 대해 친척이 아니라 대면하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겼다고 한 것도 이 시기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 소론(少論)의 선비 류한규(柳漢奎)는 세 부인을 상처(喪妻)하고 셋째 부인 선산김씨 사이에서 아들 흔(俒)만을 남긴 나이 45세 때에 “한 처녀가 경사에 통하고 행실이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 청혼을 한 것이 바로 25세의 사주당 이씨로써 1남 3녀를 두었다. 아들 희(僖)는 후에 실학 백과전서파(實學 百科全書派)의 대가(大家)가 된다.

 

류한규의 자(字)는 서오(瑞五)이며 시집(詩集)으로 애오집(愛吾集) 2권을 남겼다. 부는 생원 담(生員 紞)이고 조부는 안협현감 응운(安峽縣監 應運), 증조는 필선 연(弼善 ), 고조는 충훈도사 시정(忠勳都事 時定)이며 문성공 순정(文成公 順汀)의 10대손(十代孫)이고 이판공 이(吏判公 怡)가 13대조(十三代祖)이다.

 

남편 류한규는 정조 등극 뒤 휘릉참봉(徽陵參奉)으로 출사하여 목천현감(木川縣監)을 역임했으나 사주당 나이 45세(1783)에 남편의 죽음으로 삶이 힘겨워졌으며 류희의 나이는 11세였다. 3년 상(喪)을 마친 뒤 전 부인 아들 흔(俒)에게 내가 늙지 않았으니 누를 끼치지 않겠다며 용인으로 거처를 옮겼으나 호미도 없이 밭을 일구고 촛불도 없이 길쌈을 했으며 소금반찬으로 밥을 먹었지만 화식(貨殖: 재물증식)에도 힘써 힘겹게 돈을 모아 선대의 묘를 관리했다. 글을 읽고 쓰는 것은 버릴 수 없는 일로서 아들 희(僖)는 ”글에 있어서 경사(經史: 유교경전이나 역사서)는 있었지만 자집(子集: 주석서나 시문)은 안했다고 한다. 당호도 희현(希賢: 현명함을 추구함)에서 사주(師朱)로 바꿨다.

 

사주당은 당쟁에 휩쓸릴 걱정도 있었겠지만 아들에게 과거에 나가지 말고 선비의 길을 따르라고 가르쳤다. ‘남악유진사묘지명‘ 에서 류희는 “나는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님의 가르침을 받았다” 고 했다. 사주당은 여러 저술을 했지만 전해지지 않는데 그중 62세에 지은 조선시대 유일한 태교서적인 『태교신기』가 있다. 젊었을 때 지은「교자집요」를 20년 뒤 막내딸의 궤짝에서 발견하자 이 책에서 ‘태(胎)를 기르는 방법’ 만을 따로 떼어내 『태교신기』를 완성한다. 이를 아들이 재편집하고 우리말로 해석했는데 이를 1936년 위당 정인보가 태교신기음의서략(胎敎新記音義序略)을 쓰고 증손인 류근영이 1937년 발간하여 세상에 알려졌다. 사주당은 고질 때문에 고생을 하면서도 책을 놓지 않았으며 1821년 9월에 83세로 타계하기 전『태교신기』만을 남기고 모두 태우라고 유언했다. 아들 류희는 “어머니의 바탕은 장부이셨으나 행실은 부인이었노라(質丈夫行婦人)” 라고 썼다.『태교신기』는 현재 의과대학교 교재로 사용하고 있을 정도의 의학서이며 사가(史家)들은 신사임당에 이어 조선 남성 선비와 견줄 만한 여성 선비였음이 드러나고 있다고 했다.

 

서파(西陂) 류희(柳僖: 1773~1837)는 백과전서파(百科全書派: 18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간행된 백과전서의 편찬에 종사했거나 협력한 사상가, 학자들)를 대표하는 학자이다. 조선 후기에는 주자학을 비판하면서 실용과 실증에 바탕을 둔 새로운 학풍이 일어났다. 이전의 학자들이 중국의 통전(通典)이나 문헌통고(文獻通考) 등을 비판 없이 인용하였는데 반하여 조선에 맞는 지식을 선별하여 기존의 지식을 새롭게 집대성한 것이 백과전서파이었다. 류희는 평생 80여 권에 달하는 문통(文通)이라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이 저술은 경학(經學)은 물론이요 천문, 지리, 역사, 의학, 태교, 한글 등을 망라한 것으로 조선 후기 지성사에서 박학(博學)의 상징으로 평가되어 현재 문통(文通)에 대한 연구가 심도 있게 진행되고 있다.

 

참고문헌 : 「文通의 종합적 검토」「진단학보」「아산연구원 ⑨영ㆍ정조 이후 여성 선비 르네상스」

 

류희(柳僖)가 지은 저술(경학, 천문, 지리, 역사, 의학, 태교, 한글 등) 모음(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