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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부인 류씨(貞夫人 柳氏)

  연산군 5년~선조 11년, 1499~1578

정부인 류씨 장남 남언순, 차남 남언경의 문헌 일부(貞夫人 柳氏 長男 南彦純, 次男 南彦經 文獻 一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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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인 류씨는 연산군 5년(1499) 2월에 증좌찬성 성균 진사공 류한평(柳漢平)과 수사공 홍귀해(洪貴海, 父 益生)의 따님인 남양홍씨의 2남 2녀의 둘째 딸로 진사공이 타계한지 5개월여 만에 유복녀(遺腹女)로 태어났다. 조부는 사예공 자문(子文)이며 증조는 북부령공 류열(柳悅), 고조는 청백리공 류겸, 5대조는 정평공 류구(柳玽)이다. 큰 오빠는 인동(寅仝)이고 둘째 오빠는 정민공 진동(辰仝)이며 언니는 화순인 최감(崔堪)에 시집갔다. 정부인 류씨의 외조모는 여흥민씨 돈령 민효열(閔孝悅)의 따님으로 조부 민중립의 동생이 판도판서 민중리(閔仲理)인데 그의 사위가 상주인 판사 김기(金淇)로 북부령공 류열의 장인이다. 대고모부가 관찰사 김관도(金觀道)로 김기의 아버지이며 민중립, 민중리의 부친이 여산 부원군 민근(閔瑾)인데 정부인 류씨의 6대조인 호양공 류혜방과 동서지간이 된다. 정부인 류씨의 아버지 진사공은 부친 사예공의 억울한 누명을 벗고자 자료를 찾아 상소하는 등 대과의 꿈을 접고 16년에 걸친 오랜 투쟁 끝에 누명을 벗었으나 그 충격으로 35세인 연산군 4년(1498)에 타계하였다.

 

정부인 류씨의 어머니 남양홍씨는 생업(生業)과 가업(家業)은 물론 자녀들의 훈육에 힘써 큰 아들 인동은 상신(相臣) 윤필상의 손녀와 혼사를 이루었고, 차남 진동은 공조판서에 올랐으며 유복녀인 정부인 류씨는 남다른 애정으로 훈육에 힘써 효제(孝悌)는 물론 예지와 덕망을 갖춘 규수로 키워 의령인 남치욱(南致勗)과 혼인하여 부군이 경흥부사와 안주목사를 역임하기까지 현철한 내조의 공이 컸으며 슬하에 4남1녀를 두어 의령남씨 가문을 명가의 반열에 서게 함으로써 현모양처의 귀감이 되었다. 남치욱은 동생 남치근(南致勤 ?~1570)과 같은 해 중종23년(1528) 무과 장원에 합격하여 남치근은 삼도토포사로 임꺽정을 토벌하는데 공이 컸으며 정부인의 친정 조카인 우봉현감 류용(柳溶)과 함께 했다. 長男 남언순(南彦純, 1522~1570)은 무과 급제하여 승지와 병사, 병조참의를 지냈으며 외삼촌 진동의 영향으로 학문과 글씨에 능하였다. 남언순의 큰딸은 예조, 병조, 이조판서를 역임한 양천인 허성(許筬)의 배위가 됐는데 허성은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의 형이고 여류시인 허난설헌(許蘭雪軒)의 오빠이다.

 

남언순의 셋째아들 남타(南拕)의 증손자는 약천 남구만(南九萬, 1629~1711)으로 소론의 영수이며 영의정에 오르고 글과 학문에 능해 충장공 류림(柳琳)의 신도비문을 찬(撰)했다.

 

次男 남언경(南彦經)은 선조대의 학자로 자는 시보(時甫), 호는 동강이며 서경덕의 문인으로 공조참의를 지냈으며 슬하에 2남 4녀를 두었다. 조선조 최초의 양명학자(陽明學者)로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주창하며 퇴계 이황의 주자 학문에 쟁론을 벌여 삭직되기도 하였는데 퇴계집에 남시보(南時甫)에 보낸 간찰 내용이 이를 잘 증명하여 주고 있다. 남언경의 딸이 충정공(忠靖公) 심열(沈悅,1569~1646) 에 시집갔는데 후에 영의정에 올랐으며 시와 글씨에 능하여 특히 시는 심오전아(深奧典雅)하면서 호상활달(豪爽豁達)하였다. 三男 남언진은 1남 4녀를 두었는데 외아들 남발(南撥, 1561~1646)이 우계 성혼의 문인으로서 장령과 상의원정을 역임했으며 저서 화은집이 전한다. 남발의 손자 남유성(南有星), 남필성(南弼星), 남몽성(南夢星)은 정언, 형조참판, 병조정랑을, 남오성(南五星)은 삼도수군통제사를 역임했다. 남언기(南彦紀)는 선조대의 학자로 자는 장보이며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글씨와 문장에 능했으며 저서에 고반유편이 전해 온다. 정부인 류씨의 묘지명을 영의정 인재 홍섬(忍齋 洪暹, 1504~1585)이 지었는데 태어날 때부터 외모가 단정하고 어질었으며 예와 의리를 존중했고 거친 옷을 입으며 규방의 모범을 지켰다. 시가(媤家)의 살림이 넉넉지 않았음에도 맏며느리로서 어른을 섬기고 은의와 예도가 지극하였고 역사와 훈계의 글을 가르쳤고 선조의 기일에는 생전처럼 정성을 다했다. “옥 같고 죽순 같은 여러 손자가 있고 여성으로서 사대부 행실이 있으니 곧은 절조 행적에 나타나 있네[玉笋諸孫 女也士行 最迹貞磻] 내 어찌 아첨해서 듣기 좋은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이묘지에 사실만을 기록합니다[辭肯阿好 誌在丘原]“ 하였다. 정부인 류씨는 홍섬의 부친인 영의정 홍언필과 외사촌 관계이며 홍섬은 류진동과 장인 진산군 류홍(柳泓), 처남 온양공 류사필(柳師弼)의 신도비문을 지은 인연이 있다.